추모비 건립 특강 ...목차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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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목차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목차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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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0회 작성일 23-08-11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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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추모비 건립 특강 / 이성원


2017년 10월 14일

장소: 금선정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주관: 영주시, 금계문중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다시 쓰는 ‘금계황선생행장’-


목차

1. 퇴계, 금계 행장을 쓰다.

2. ‘진정한 도학자임을 알게 되었다’

3.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앉아 책을 읽었다”

4. ‘嗚呼 亡友 錦溪黃先生!’

5. “주자 책을 함께 읽었으며, 몇 번이고 같이 눈물 흘렸다“

6. “감사가 가면 가는 것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냐.”

7. ‘秋山欲畫 澄江如鏡’

8. ‘신선들의 높은 모임 전설이 되리니!’

부록

1. 퇴계의 행장

2. 제문

3. 만사

4. 금양정사완호기문

5. 단양진폐소,

저자 李性源

이성원은 안동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한문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학진흥원연구원, 도산서원수련원강사, 청량산문화연구회회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청량산 자락 가송리 강변에서 고택을 개방하고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다. ‘

‘농암 이현보의 강호문학’, ‘이황, 이이 이기론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퇴계식의 교육과 인생’, ‘안동의 종택문화’, ‘안동의 집회문화’, ‘도산9곡과 유교문화’, ‘오천 군자마을 약사’, ‘문절공 김담 탄신 600주년 기념’, ‘보백당 김계행 서세 500주년 기념“ 등의 글을 썼다. 단행본『천년의 선비를 찾아서』(푸른역사)가 있다.

1. 퇴계, 금계 행장을 쓰다.

1)사후 잊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존경받는 인물이 있다. 그런 사람이 정영 인물이다. 금계(錦溪 黃俊良, 1517-1563)가 그런 인물이다. 지금 금계를 재조명하는 글이 우후죽순처럼 발표되고 있다. '답사기‘로 유명해진 유 아무개 눈에 띄어 극찬 받은 바도 있다.

소疏와 전箋 5편이 있는데,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는 퇴계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남명의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와 회재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와 더불어 ‘한국4대 상소문’이라 일컬어질 만큼 명문이다. 퇴계 67세, 남명 55세, 회재 49세, 금계 41세에 지었다.

나는 4편 가운데 금계의 글을 최고로 본다. 왜냐하면 금계의 글은 글로써 그친 것이 아니라, 임금의 마음을 움직인 유일한 글이기 때문이다. ‘진폐陳弊’는 곧 ‘적폐’이니, 그야말로 적폐청산을 이루어낸 글이다. 금계의 문장이 이를 이루도록 했다. 식자들의 주목은 당연하다. 만약 천하명문이 있다면, 만약 피를 토해 쓰는 글이 있다면 금계의 상소문이 그런 글이라 할 수 있다. 목민관 필독의 글이며, 영원한 상소문으로 존재한다.

금계는 이 한편의 글만으로도 ‘선생先生’이 되고도 남는다. 선생이 별 인물인가. 청빈, 근면, 애민의 관리, 빼어난 학문의 선각적 안목을 지닌 관리가 고금에 어디 흔한가! 결국 그런 생애가 퇴계의 마음을 격동하게 했고, ‘금계황공행장錦溪黃公行狀’이라는 글의 저술은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추모사였다.

퇴계선생(退溪 李滉, 1501-1570)은 엄청난 글을 썼다. 역사상 최대 저술을 남긴 단 한 분이다. 시, 서, 시가, 기문, 발문, 논술, 상소문, 제문, 빗 글 등등. 그야말로 文, 史, 哲을 아우르는 온갖 장르의 글을 끊임없이 지었다. 2천편, 3천편이 넘는 시와 편지 등이 그런 결과물이다. 거의 초인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요청했다. 그래서 시도 써 주었고, 편지도 써 주었다. 현판 같은 글씨도 썼다. 월천서당月川書堂, 관물당觀物堂, 후조당後彫堂, 겸암정謙庵亭, 임연재臨淵齋, 설월당雪月堂, 선몽대仙夢臺, 성재惺齋, 경류정慶流亭, 송당松堂, 세심대洗心臺 등등.

퇴계는 글과 글씨를 써 주는 것에 대해 별로 사양한 것 같지 않다. 아니 적극적으로 써 주었다. 사직소와 편지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전하는 수단으로 애용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정중한 글, 청탁의 글과 비지문碑誌文은 그렇지 않다. 매우 신중했고 거듭 사양했다. 써 주게 될 때도 사실 하나하나를 점고했고, 글자 하나하나를 따지고 따졌다. 정확함에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 되었다. 항상 역사와 글의 불후不朽함을 의식했다. 조상과 인척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1561년, 안동 권문權門의 부탁으로 쓴 ‘安東三太師廟增修記’의 경우, '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라고 썼다. ‘태사묘’라 쓰지 않고 ‘공신묘’라 했다. “태사 벼슬의 제수는 오직 권씨 족보에만 나타나니, 무슨 근거인지 모르겠다(太師之授 獨見於權譜 未知何據)”고 했다. 퇴계는 자신이 ‘권문權門의 외손으로 썼다’고 했지만, 이 글을 받은 안동부사 권응정權應挺은 이 기문을 채택하지 않았다.

『태사묘사적』에 퇴계가 이 글을 쓸 때의 태도를 보여주는 글이 있어 소개한다. 퇴계는『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을 본 이후 비로소 글을 지었고, 그때 기록들을 벽에 써 두고 이를 보아가며 썼다고 했다. 기록은 이러하다.

“노선생이 ‘태사묘묘정비기문’을 지을 당시, 사적이 상세하지 않아 오래 동안 초를 잡지 못했다. 2단 문자(『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를 얻은 후 비로소 지었다. (그때)이 이단 문자들을 우측 벽에 친필로 써서 붙여 놓고 보아가며 초를 잡았다. 그 후 계묘년에 다시 벽을 도배할 때 이 글과 다른 친필을 얻어 책을 만들어 본원(태사묘)에 두었다.”

원문: 老先生 作太師廟廟庭碑記文時 未詳當時史蹟 久未構草 得此二段文字 後始爲做成 此文字親筆書于座右以爲考覽而構草 其後癸卯改塗壁時 得此及其他親筆 而作帖冊 置本院

과장, 과시, 허명을 가장 싫어한 분이 퇴계였다. 그런 품성이 ‘유언(遺戒)’으로 남아 ‘내 비석을 하지 말라’ 하고, 하더라도 ‘조그만 돌(小石)에 열 글자만 써라’ 했다. 그래서 남은 글씨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이다. 해석하면, “계상과 도산에 늦게 은거해서 살아간 진성 이 아무개의 묘”이다. 아주 소박하다. 이름 석 자만 쓴 셈이다. 관례라면 “崇政大夫判中樞府事 兼 知經筵春秋館事 贈 大匡輔國崇綠大夫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諡 文純公退溪李先生之墓”라는 거창한 이름을 써야 했다. 수백, 수천 자에 이르는 거석의 신도비도 세워야 한다. 이를 사양한 사람이 퇴계였다. 그것도 유언으로.

퇴계는 명예를 멀리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전 생애를 걸어간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아름답고 행복한 분이다.

지금 『퇴계집』에 남아 있는 청탁의 글은 한 결 같이 퇴고를 거듭한 완벽한 글이다. 그럼에도 빗 글의 경우에만도 47편의 적지 않은 글을 남겼다. 그만큼 요청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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