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회재, 충재의 행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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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회재, 충재의 행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회재, 충재의 행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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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23-08-11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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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의 도학정치로 인해) 선비의 학문은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의 다스림은 이로 인해 거듭 밝아질 수 있었으며, 도학은 이에 힘입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나라의 기맥도 이에 힘입어 무궁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당대의 사림士林의 화禍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선비의 학문 방향, 세상의 밝아짐, 도학의 정립, 나라의 기맥이 정암의 도학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결과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학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정암은 죽음을 당했고, 충재, 회재 역시 귀양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세 분 뿐 아니다. ‘사림의 화’에 이르렀다. 도학은 그런 학문이 아니다.

퇴계는 정암을 정면 비판했다. ‘3가지 오류’가 있으며, 핵심은 ‘진퇴의 잘못’이라 했다. 행장의 글은 이러하다.

“도학과 도학자를 위하는 길은 입언수후立言垂後 단 한 가지뿐이다. 그러나 지금 선생은 그렇지 못했다. 첫째 불행은 등용, 발탁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둘째 불행은 물러남을 구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셋째 불행은 귀양지에서 일생을 마친 일이다. 중년에 충분한 경륜을 쌓을 시간이 없었으니, 입언수후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책임을 내린 뜻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원문: 所恃以爲斯道斯人地者。有立言垂後一段事爾。今先生則未然。一不幸而登擢太驟。再不幸而求退莫遂。三不幸而謫日斯終。向之所謂積累飽飫於中晩者。皆有所不暇矣。其於立言垂後之事。又已無所逮及焉。則天之所以降大任於是人之意。終如何也。

‘삼불후三不朽’는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이다. ‘입언수후立言垂後’는 말을 남겨 세워 후세에 드리우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입언군자立言君子이다. 공자, 맹자, 주자 같은 분들이 이를 실천하여 만대에 그 덕을 밝혔다. 그래서 군자를 넘어 성현이 되었다. 불후의 명작, 이것이 문명文明이다. 사서四書 등이 이런 책이다. 이런 경우, 입언은 입덕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인데, “정암은 전연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정암의 오류는 명백하여, 결국 삼불후에 하나도 이르지 못한 불행한 생애가 되었다.

“경륜 부족으로 그르쳤다”는 직선적 표현은 박순朴淳에게 보낸 편지에도, "어찌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 잘못에 온 판이 그릇되지 않습니까, 기묘영수(정암)가 공부가 완성되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으면서, 경세제민을 자임하여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경륜의 부족’이 ‘진퇴의 잘못’이 되었고, 그 잘못은 ‘공부 부족’이라 했다. “물러나기를 구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이것이 귀양으로 이어지고 불행이 왔다”고 했다. 진정한 도학은 올바른 진퇴거취의 소신이 있어야 했다. 성현들은 관직으로 승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퇴계는 “하늘의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절규하고 있다. 동방의 성현 등장이 이로서 무위가 되었고, 퇴계의 끊임없는 ‘진이모퇴進而謀退’의 처신 역시 여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도학'과 '도학자'의 정의에 대하여 율곡은 이런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상고하건데 ‘도학’이란 이름이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출처에 합당하면 되겠지만, 세상이 쇠퇴하여 성현의 뜻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충효의 의義만 알았지 ‘출처出處의 의義’와 ‘성정性情의 뜻’은 알지 못했다. 이로써 출처와 성정을 아는 자를 도학자로 지목했다."

『율곡집』‘經筵日記’

‘충효보다 더 높은 가치’가 ‘출처의 의리’와 ‘성리의 연구’라고 하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도학자라 했다. 사림 개개인의 처신 지침으로, “오당吾黨의 사士가 이를 힘써야 한다.”고 했다. 퇴계는 이 규정으로 보면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은 재야在野로 생애를 마쳤다. 그야말로 처사處士였다. 출처에 대해 고뇌한 인물이다. 남명행장은 제자 정인홍鄭仁弘이 지었는데, 글 속에 이런 부문이 있다.

“선생은 출처를 심각하게 보고, 군자의 큰 절조로 삼았다. 고금의 인물을 논할 때 반드시 그 출처를 본 다음, 행실의 잘잘못을 논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근세에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지만, 출처가 의리에 맞는 사람은 내가 듣지 못했다. 오직 경호景浩(퇴계의 자)만이 옛사람에 가깝다’라고 하셨다. “

원문: 深以出處。爲君子大節。泛論古今人物。必先觀其出處。然後論其行事得失。嘗曰 近世以君子自處者。亦不爲不多。出處合義。蔑乎無聞。頃者惟景浩庶幾古人。

2)

‘회재행장’은 어떻게 쓰였는가? 도학자로 평가되었지만, 경우는 조금 달랐다. 회재는 남명, 율곡으로부터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았으니, 그렇게 평가가 굳어버릴 뻔 했다. 그러나 퇴계 안목에는 전연 다른 인물이었다. ‘선생’이라 했고, ‘동방4현’이라 했다. 퇴계는 그 이유를 "도학적 저술을 남겨 우리나라를 문명국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고 하고, '오직 한 분뿐이었다'고 했다. 소신의 평가였다. ‘퇴계언행록’의 한 부문의 글은 이러하다.

“우리 동방에 도학자가 없지 않았지만 문헌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 조예의 얖고 깊음을 상고 할 수 없다. 우제주(우탁). 정포은(정몽주)은 시대가 멀고 한휜(김굉필). 일두(정여창) 같은 학자들은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지만, 문헌을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참고로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직 회재 한 분이 있을 뿐이다...조예가 깊지 않고서야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퇴계에게 ‘도학’은 문명국의 학문이다. 중국이 문명국이 되었음은 도학적 저술을 남긴 공자, 맹자, 주자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 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엄청난 저술활동 역시 이러한 문명국의 문화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주자를 의식한 결과이다. ‘주자는 나의 스승입니다’ 한 퇴계는 물론이며, ‘정암靜菴’, ‘회재晦齋’가 모두 주자의 호, ‘회암晦菴’을 인용해서 사용했다.

퇴계는 “우리나라는 옛 부터 성인이 살고자 했고, 기자 같은 성인이 살았던 곳”이라 했다. 성인이 도학을 했기에 도학을 해야 할 당위가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도학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 없기에 사상의 위기가 왔다. 과거 도학자가 없지 않지만,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에 제대로 과업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퇴계는 우리나라가 ‘혼란에서 질서로’, ‘야만국에서 문명국’으로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연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가 되었고, (이를 계승한) 고려는 5백여 년 동안 세상에 도리가 일어나고, 문화의 풍토가 차츰 열리어 중국으로 유학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경학(도학)이 따라서 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혼란이 질서로 변했고,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우리나라를 현재 ‘문헌의 나라(文獻之邦)’, ‘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고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도산전서』‘論人物’

‘문헌의 나라’ 는 도학적 저술의 축적된 국가를 말하며, ‘군자의 나라’는 진퇴거취의 겸양이 넘치는 사회를 말한다. 두 가지가 야만의 오랑캐를 면하고, 문명국의 건설에 기여하는 결정적 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도학이며, 도학자가 할 일이다. 그래서 회재행장에도 ‘도학의 절실한 추구’와 ‘출처의 대절’을 동시에 언급했다. 그 글은 이러하다.

“황이 삼가 받아 읽고 반복해서 참고하고 연구하며, 옛 성현들의 말씀과 대조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선생이 도학에 대해서 이렇게 절실하게 추구하고, 이렇게 힘을 다해서 행하고, 이렇게 바름을 얻었다. 그리하여 무릇 선생의 출처의 대절과 충효의 일치가 모두 근본 하였다.”

원문: 滉謹受而伏讀之 反覆參究 質之以古聖賢之言 於是始知先生之於道學 其求之如此其切也 其行之如此其力也 其得之如此其正也 而凡先生之出處大節 忠孝一致 皆有所本也

김창회金昌會 천사川沙 종손께서, “퇴계가 회재행장을 쓰는데 초고가 고리짝으로 하나였다”는 전언傳言 말씀을 해주셨다.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이 말이 갖는 의미는 “정성으로 고처 쓰기를 수도 없이 했다”는 뜻이다. 행장 글에 “읽고 반복해서 참고하고, 검토하며 대조해 보았다”는 소회가 있어, 이 말의 근거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퇴계 모든 행장 글이 다 그렇다. 고뇌의 소산이고 고심의 역작이다. 글 자체로 작품이다. 지금 이 초고의 퇴계 친필 글들이 나타나는데 보면, 지우고 다시 쓰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3)

충재 행장은 어떻게 쓰였는가. 행장에는 을사사화에 대응하는 충재의 모습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생생한 육성 그대로다. 죽음을 무릅쓴 충언 한 마디는 천 마디 논리보다 귀하다. 그 글을 3단락으로 요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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