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선생의 금계에 대한 마음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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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02회 작성일 23-08-11 12:30본문
금계의 ‘단양진폐소’는 선배들의 상소문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나온 자신만의 작품이다. 자연 이들 상소문을 넘어서는 글을 쓰고자했을 것이고, 드디어 넘어서는 글을 썼다. 퇴계의 ‘무진육조소’는 자신의 사후에 지어진 글이라 볼 수 없었다. 아마 생전에 퇴계가 썼다면 더욱 정치하게 검토했으리라 여겨진다.
대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역임한 아계 이산해는 시문에도 출중했다. 도산서원 석벽에 ‘천연대天淵臺’ 글씨도 썼다. 아계의 젊은 날의 금계 시문에 대한 평가는 극찬인데, 그럴 만했다. 그 글은 이러하다.
“읽어보면 봄 구름이 하늘에 떠가는 듯, 꽃잎이 하늘 햇살에 비치는 듯, 원숙하고 혼후하여 그 끝을 다 엿볼 수 없다. 어찌 일반 문인, 재사들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원문 : 讀之則如春雲行空。天葩映日。圓熟渾厚。無涯涘可窺。豈尋常文人才子之所可企及乎。
『금계집』내집 제4권 잡저,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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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공직 자세와 관련이다. 글이 지적 영역이라면, 공무는 동적 활동이다. 퇴계가 “넉넉하여 장차 무슨 일을 맡겨도 역량을 베풀지 못할 데가 없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다. 공직자의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청렴하고 근면하며, 선각적 안목을 지녔다.
청렴은 행장 기록처럼, “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서 베를 빌려 염斂을 했는데 의류가 관을 채우지 못했다”고 쓰였다. 20여년의 공 직 생활, 지나칠 만큼 청렴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청빈함을 드러내지 않아 전연 몰랐다” 고 했다. 퇴계 기록이니 틀림없다.
공직자세도 확고하다. ‘거관사잠居官四箴’이라는 공무방침을 표하고, 그렇게 했다. 조목이 세분되어 있는데, 주요함은 이렇다. 지금 관공서에서 그대로 사용함은 어떨까.
持己以廉 청렴으로 몸을 지키고
臨民以仁 사랑으로 백성을 대하고
存心以公 마음은 공익에 두고
莅事以勤 일은 부지런해야
위 언급 된 인물 가운데 점필재, 농암, 회재, 신재, 퇴계, 서애가 청백리에 녹선 된 분들인데, 금계가 여기 포함되어 있지 않음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계는 20여년 봉직했다. 내직으로 성균관학유, 학록, 학정, 박사, 전적, 공조좌랑, 호조좌랑, 춘추관기사관, 병조좌랑,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신령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내직에서 『중종실록』,『인종실록』편찬 임무를 수행하는 등 항상 글과 가까운 책무에 있었다. 운명의 직책이 사헌부지평이었다.
사헌부에서도 지평은 탄핵기관의 핵이었고, 감찰의 꽃이었다. 대검중수부장이 그 자리일까?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별칭 ‘대간臺諫’이라 하여 당대 최고 소장 엘리트가 거치는 곳이며, 그 임명에는 정승까지 참여했다. 임금에게 간쟁하고, 관료들을 감찰, 단죄하는 만큼 자신에게는 스스로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였다. 대간은 그야말로 청직과 요직을 합한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금계는 청탁을 거절했고, 이로 말미암아 모함을 입었다. 신령현감은 자청하여 나온 자리였다. 이 점은 농암과 흡사하다. 농암은 지평에서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고, 그 길로 8개 고을 25여년을 지방 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부임지마다 감동의 목민관이었다. 농암의 공직자세의 특징은 지방을 찾아가는 현장행정이고, 깨끗한 정계 은퇴였다. 농암에게 중앙 요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금계에게도 지방 직은 천직이었다. 애민의식 때문이었다. 금계는 상소문에 전임자들이 “살을 도려내고 골수를 우려내며 거북 등처럼 털을 벗겨 못하는 짓이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여민동고與民同苦’하는 마음이다.
근면은 목민관의 기본이다. 내가 어느 날 황재천 종손과 대화에 “원고 마감 날짜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하니, 말씀이 “우리 할배가 잠을 안주무시고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러지 말라” 한다. 큰 꾸중이고, 뜻밖에 말씀이다. 그런데『금계집』을 읽어 보니 종손의 말씀은 공감이 갔다. 잠을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신 것 같다. 민생에 진력에 교육에도 최선을 다했다. 교육이 적폐청산의 열쇠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퇴계가 되고자 하는 단 하나 소망이 ‘신선神仙’이라 했다. 그것은 내면적인 일이다. 외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단 하나, ‘교선인敎善人’이다. 퇴계는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 를 말한 바 있고, 그 연장선에 서원창건 운동이 있다. 한국 최초의 서원, 영주 소수서원의 사액청원을 하는가 하면, 안동 최초의 서원, 역동서원 창건을 주도했다. 자신의 도산서당 건립도 그 일환이다.
금계는 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학교 4개를 창건하고, 4개를 중수했다. 35세 신령현감, 41세 단양군수, 44세 성주목사 임기 동안 실천했다.
금계의 교육 사업은 이렇다. 1551년 영천 신령향교 확장, 백학서당 창건, 1557년 단양향교 이전, 1560년 성주향교 중수, 영봉서원 확장, 녹봉정사 창건, 공곡서당 창건이 있었으며, 만년에 고향 영주에 금양정사를 창건했다.
신재 주세붕이 한국 최초 백운동서원을 창건 한 해가 1541년이고, 그 서원에 퇴계가 사액을 청원한 해가 1548년이다.
퇴계가 1570년, 70세에 역동서원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을 볼 때, 여간 앞선 일이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스승이 나서기 전에 제자가 먼저 뛰어든 셈이었고,『주자서절요』의 빠른 간행도 이런 교육에 교과서이기 때문이었다.
백운동서원 창건 초기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건립 후 신재를 따라 알묘를 하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1547년에는 관찰사 안현安玹 등과 백운동서원 운영의 장기대책을 수립했다. 그 계획서가 ‘사문입의斯文立議’인데, ‘유림이 결의했다’는 뜻이다.
이 결의에서 향사, 원우수리院宇修理, 양사養士, 심원인사경대尋院人士敬待, 임원, 비품집기, 전답, 서책, 공괘供饋 등의 사항을 결정했다. 금계는 이때 신재의『죽계지竹溪志』에 대해서도 편지를 써서, 그 편차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글 일부는 이러하다.
“『죽계지』편목을 보았는데,..죽계竹溪는 안씨安氏 세거지입니다. 안씨들의 글을 모아 ‘죽계지’라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그 사이에 집어넣어 ‘죽계지’라고 하였으니, 억지스러운 문제가 없겠습니까? 이미 ‘회헌(安珦)의 마음을 알려면 마땅히 회암(朱子)의 글을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 말로 그 뜻이 다 표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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