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와 농암선생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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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회 작성일 23-08-11 12:34본문
금계 장인은 농암 맏아들 벽오 이문량李文樑이다. 퇴계가 도산서당 건축의 감독을 맡겼으며, 150여 편의 편지가 남아 있다. 처삼촌 관찰사 하연 이중량李仲樑은 퇴계와 동방급제 했으며, 50여 편의 편지가 남아있다. 하연과 퇴계 두 분 우정을 지켜본 금계가 “하연이 퇴계가 칠월 기망에 장난삼아 지은 시에 삼가 화답 한다(謹和賀淵戱退溪七月旣望之作)” 는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농암, 퇴계 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농암 증조부 이파李坡에게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李繼陽은 외손서이다. 농암은 증손자이고 퇴계는 외현손이니, 7촌 척질戚姪이 된다. 퇴계는 ‘족질族姪’이라 한 바 있다. 1549년 2월 한식일, 이파의 묘소 입석 고유(焚黃告由)에 풍기군수로 제수를 준비하고 참석하여 묘갈문을 짓고 표석 글씨를 쓴바 있다.
최근 노송정종택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분재기에 농암 숙부 이균李鈞의 친필 보증 서명이 있다고 이창건 종손이 말씀하시어 살펴보니, 분재는 노송정 부인 영양김씨가 했고, 이균이 문서 작성과 서명을 했다. 이쪽에서는 고종4촌이고, 저쪽에서는 외4촌이니 말하자면 내외종간이었다. 부인에게 농암 아버지 형제는 외4촌이니 그럴 수 있으리리 생각된다.
영양김씨는 1430년 10월 4일 출생하시어 1522년 9월 5일 돌아가셨고, 이균은 1442년 출생하시어 1540년 돌아가셨다. 93세, 99세를 사셨다. 분재는 1510년 4월 했으니, 80대 영양김씨가 70대 외사촌에게 분재를 주관하도록 한 듯 하다. 여기에 98세, 85세를 사신 농암의 부모 역시 자주 래왕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노송정 동서 김홍(문절공 김담 동생) 역시 고종4촌이며, 다른 한편으로 농암 어머니 안동권씨에게 김홍은 외삼촌이 되었으니 한 집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노송정의 아들이며 퇴계의 숙부가 되는 송재 이우李堣는 농암과 동방 급제했다. 그래서 퇴계, 하연의 동방급제와 더불어 양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농암 아들 6형제, 사위 등과도 모두 친밀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퇴계 제자도 진성이씨 다음으로 많다.
내의원판사로 퇴계 최후를 진맥한 행암 이윤량李閏樑, ‘선성3필宣城三筆’로 유명한 매암 이숙량李叔樑은 아들이다. 퇴계 종손서 양곡당 이국량李國樑은 조카이며, 계문고제溪門高第로 명성 높은 간재 이덕홍李德弘은 종손자이다. 무과급제 한 산남 김부인金富仁은 사위이고, 금계와 동서이고, 현감인 창균 김기보金箕報는 손서이니, 모두 퇴계 제자이다.
진사합격 한 맏손자 이원승李元承은 퇴계와 동서이니, 관찰사 안동 가일의 화산 권주權柱는 이들 처조부이다. 금계의 퇴계 만남은 분천 처가 때문이고, 김기보의 퇴계 만남도 역시 그렇다고 보여진다.
농암, 퇴계의 관계는 34세 연령의 차이가 말해주듯, 퇴계에게는 대선배이고, 농암에게는 아들과 같은 연령이다. 가까운 인척이며, 아들들이 친구거나 제자가 되었고, 맏손자는 동서이다. 근본적으로 횡적이기보다는 종적관계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두 분 관계는 농암은 퇴계에게 자상한 어른의 자세를 넘어서는 각별한 것이었고, 퇴계에게는 농암이 인척이나 친구의 부친에 대한 예우를 넘어서는 뜨거운 관계였다. 농암은 죽음의 순간에도 퇴계에게 시를 짓고, 퇴계는 농암에게 장문의 제문과 만사를 짓고, 제자들 앞에서 추억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도산전서』4, 470쪽, 逸詩) 행장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추모사이기도 하다. 퇴계의 농암 추모 시 한편은 이러하다.
西望巖崖勝 서편 깎아지른 절벽 승경 바라보니
高亭勢欲飛 우뚝한 정자, 날아가는 듯
風流那復覩 풍류 어찌 다시 뵈올까
山仰只今稀 산처럼 높은 덕, 지금 다시 할 수 없네
농암이 몰했을 때 아들 준寯과 금계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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