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의 집안내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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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의 집안내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의 집안내력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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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6회 작성일 23-08-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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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선생께서 마침내 돌아가셨으니, 나라와 집안의 불행으로, 우리 부자는 이제 의지할 곳이 없다. 산이 무너지는 슬픔과 시국의 어려움이 겹치니, 금년은 무슨 운명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문: 知事先生竟至損館 邦家不幸 我輩無所依仰, 答黃錦溪書曰 山頹靡仰 時事搶揚 不知今是何年何運而至此耶

도산서원 동광명실 위에 현판이 있는데, 그 주인공은 주부主簿 벼슬을 한 이운李芸(1568~1638)이라는 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퇴계 위패를 온몸으로 지켰다. 지금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서책, 집기, 고문서의 보존은 주부의 공로가 적지 않다. 개인 공로로 경내에 있는 유일의 현판이다.

퇴계 10대 종손, 고계 이휘영의 현판 추모 글에, “공은 자나 깨나 도산에서 생활했고, 도산에서 죽었으며 생사가 도산에 있었다”고 했다. 이에 그를 영원히 추모할 것을 결의했다. 근년 『이주부공실기』를 <국학진흥원>에서 번역했는데, 그 서문을 이근필 퇴계종손이 썼다. ‘서원완의書院完議’는 이러하다.

“농암 선생의 증손자인 주부공께서 왜란 당시 서원 위패를 받들어 병화를 피하도록 했으니 그 공로는 잊을 수 없다. 이에 서원당회는 매년 3월 11일 기일, 쌀 한 말, 고기 몇 마리, 꿩 한 마리를 보내 영원토록 존모하도록 결의한다.”

원문: 聾巖先生曾孫主簿公 當壬辰亂 奉出本院位版 以避兵禍 其功勞不可忘 玆以堂會齊議 每年三月十一日忌日 自院中米斗魚尾雉首備送 以爲永久遵行之事

참고로, 도산서원 광명실에 하연의 내사본內賜本 『통전通典』200권 75책이 완질로 보존되어 있다. 내사기內賜記에 “嘉靖 三十九年 九月 日 內賜 禮曹參議 李仲樑 杜氏通典 一件 命除謝恩 副承旨 李(手決)”이 있다. 우리나라에 단 2질만 남아 있다.

다른 한 질은 벽사 이우성 선생이 가지고 있다가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러나 완질로 보존된 것은 “일본 경도대학본과 더불어 광명실본이 유일하다”고 한다.

또 다른 하연의 내사본內賜本, 『문헌통고文獻通考』348권 136책(4권 결본)도 보존되어 있다. 『통전』과 비슷한 내용의 내사기가 있고, 책 끝에 ‘永陽李公幹供覽’이란 퇴계 친필이 남아 있다. “이중량에게 빌려 보았다”는 뜻이다. 아마 두 책 모두 빌려보시고 그대로 보존된 듯하다.

<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한 『선비, 그 멋과 삶의 세계』에 ‘문중 유물의 성격과 특징’이라는 보고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한 『도산서원 고전적』에 이 책들이 소개되어 있고, 이 책 조사와 보고서를 최초 쓴 분이 이정섭 전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위원께서는 한국의 온 갓 고문서, 고 전적을 조사하여 문화재로 지정했다. 당시 위원장은 임창순 선생이었다. 만년에 국학진흥원에 오시어 연구원들의 한문독해 교육과 여러 고서번역의 교열, 교감과 해제의 글을 감당하셨다. 한문 해석과, 초서 해독은 당대 제1인이다. 인품도 그렇다.

위원께서 어느 날 말씀이, “수많은 고가의 고서를 만졌지만, 한 번도 사지는 않았다”하셨다. 그 연유를 “전문가로서 혐의스러웠다” 하셨다. 갈암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후예다운 말씀이셨다. 인연이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위원께서 농암종택 고문서와 전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할 때 그 책임자이셨고, 그 때 죽유종택도 함께 했다.

다만, 이 글을 쓰기 위해 『도산서원 고전적』을 다시 보니, 『문헌통고文獻通考』의 결본이 7책으로 되어 있어, 보고서와는 다르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퇴계가 쓰신 유일한 친필 우리말, ‘농암 어부가’와 ‘퇴계 도산12곡’의 목판은 농암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은 모두 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일제시대, 이충호李忠鎬 퇴계종손이 주도하고, 여러분이 함께한 ‘농암선생영정각’의 건립에 전 퇴계자손이 1량씩 부조했고, 그 부조기는 김호길金浩吉 박사의 고모부인 우석 이탁李鐸이 써서 작첩했다. 합방직전, 화재로 소실된 퇴계종택의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복원에 농암종택에서 애일당, 분강서원을 합해 200량을 부조 했다. 양가에 부조기扶助記가 남아 있고, 최근 이근필李根必 종손은 ‘한수정부조기’를 영인하여 관련 집집마다 반질한 바 있다.

1000원 권 지폐 한 면은 도산서원 전경이다. 그 좌측 상단에 아주 작은 모습의 애일당愛日堂이 보인다. 그 그림만큼 두 가문은 오랜 세월 지척을 함께 했다.

2)

금계가문은 금계 5대 조부가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1421)이다. 장인이 형조판서 정운경이고, 처남이 삼봉 정도전鄭道傳이며, 외손자가 이조판서 김담金淡이다. 세 판서가 한 집에서 태어나 ‘삼판서 고택’이 되었다. 농암 어머니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 집에서 생장했는데, 외가였다. 김담이 외삼촌이니 그 외조부 황유정과 더불어 한 집에 살아온 셈이다.

황유정의 외조부는 안향安珦의 삼종인 안축安軸으로, 정도전과 사돈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양대 문하시중인 우팽禹伻의 외증손이다. 역동 우탁禹倬과는 4촌이며, 우현보禹玄寶 와도 당내 촌수이다. 모두 어마어마한 가문이다.

황유정의 5대 조부 황유중黃裕中과 아들 황서黃瑞는 양대 문하시중이다. 이 무렵 이 가문은 국반國班에 이르고 있었다. 조부는 영해부사 황원로黃原老이며, 아버지는 직제학 황근黃瑾이고, 본인은 판서이며, 아들은 지평 황전 黃銓, 대사성 황현黃鉉과 황연黃鋋이었다. 황연黃鋋이 금계 고조부가 되고, 증조부는 황말손黃末孫, 조부는 황효동黃孝仝이며, 아버지는 황치黃觶였다.

황원로가 영주 ‘푸실(草谷)’로 복거했다. 영주 평해황씨 금계가문은 2012년 세거 700년, 그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된 바 있다.

황유중의 후손인 선조 대 명신, 해월헌 황여일黃汝一은『평해황씨대동보』를 처음으로 간행했다. 그런데 『금계집』에 ‘서족보미序族譜尾’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계가 최초 간행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황유정의 외손자 김담金淡은 시호가 문절공文節公이다. 발군의 집현전 학자로, 영남 최초 시호가 내린 분이다. 외손자가 훈도 금재琴榟인데, 금재는 생원 김효로金孝盧(운암 김연, 탁청정 김유의 아버지)의 사위이며, 온계, 퇴계 형제와는 사돈이다. 문절공의 생질이 호조참판 권수익權受益인데, 그 생질이 농암이며, 외손자가 월천 조목이고, 외손서가 성재 금란수琴蘭秀였다.

동생 김홍金洪의 외손자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이며, 외손서가 회재인데, 퇴계 조부 노송정 이계양李繼陽과 동서이다. 김홍과 노송정이 농암 증조부 이파李坡의 외손서이니, 농암과는 5촌에 불과했다. 이들 가문들이 통혼 관계에 있었다.

영주 풍기와 안동 도산은 먼 거리이다. 문절공의 아버지 김소량金小良이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갔다. 금계만이 안동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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