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와 충재가문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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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23-08-11 12:37본문
駐景高堂九十春 고당의 90세 춘추
晩年還着退休人 만년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潯陽歸去陶元亮 심양으로 돌아간 도연명陶淵明이고
鑑水風流賀季眞 감수의 풍류객 하지장賀知章일세
日煖芝山挑玉甲 따뜻한 날 영지산에서 버섯을 캐시고
煙開汾曲網銀鱗 안개 갠 분강에서 물고기 잡으시네
江湖不管憂時責 강호에서 시국을 관여할 수 없지만
猶向彤闈入夢頻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야 꿈속엔들 잊을 날 있으실까
충재는 시작詩作을 즐기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친밀도는 다르지 않다. 농암과는 농암이 안동부사 시절 안동양로연을 배풀때 충재가 그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고, 그 때 축하시를 썼다. 그 해 농암이 충재의 안동 도촌 집을 찾아갔고, 서울 동대문 밖 사저에서도 만났다. 지금의 닭실 이주도 농암의 귀거래에 영향을 받았다. 주고받은 몇 수에도 두 분 사이의 정감을 감지할 수 있다. 농암의 충재 만사는 노구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애잔하다.
충재는 퇴계와도 먼 인척관계였다. 행장에 ‘중표후생中表後生’이라 했으니, ‘中表’ 는 이종姨從, 고종姑從, 외종外從을 아우르는 호칭이다. ‘윗대 한 때 4촌 사이인가’ 하여 조사해보니, 이건 조금 복잡하다. 그러니까 충재 증조부인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사위가 이시민李時敏이고, 이시민의 맏사위가 박치朴緇이고, 둘째 사위가 송재 이우李堣이다. 박치의 사위가 진사 이식李埴인데, 이분이 곧 퇴계 아버지이다. 즉 충재 증조부는 퇴계 외조부의 외조부였다. 그런 관련으로 ‘중표’라 한 것 같다. 지금 촌수로는 따지지도 않는 관계이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들 청암 권동보, 석정 권동미는 퇴계 제자가 되었고, 퇴계 손자 동암 이영도李詠道는 권동미의 사위였다. 창설재 권두경權斗經은 오늘의 ‘퇴계종택’과 ‘추월한수정’이 존재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권동미의 맏아들 권채權采는 농암의 증손서가 되고, 둘째아들 권래權來는 문절공의 고손자 백암 김늑金玏의 사위가 되었다. 권채의 사위가 서애 류성룡의 아들 수암 류진이며, 권래는 큰집으로 양자를 가서 충재 가통을 이었다. 그렇게 연실처럼 얽혀있다.
충재가 시를 즐겨 지었으면 분명 위의 시편에도 함께했을 것 같다. 퇴계의 충재종택의 청암정靑巖亭 방문 기념 시는 이러하다.
酉谷先公卞宅寬 충재께서 닭실에 터를 잡아
雲山回復水灣環 구름 산 둘러 있고 물굽이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 외딴 섬 정자, 다리로 건너도록 했고
荷映淸池活畵看 연꽃 맑은 연못, 살아있는 그림 같네
稼圃自能非假學 채전 밭 가꾸며 즐기는 생애
軒裳無慕不相關 벼슬길 연모하지 않았다네.
更燐巖穴矮松在 바위틈에서 솟아난 조그만 소나무
激勵風霜老勢盤 풍상 세월, 바위와 함께 늙어가네
향리鄕吏에 불과했던 문절공 아버지가 판서 황유정의 사위가 된 사실은 상상이 잘 안 되는 혼인이었다. 어떤 연유로 맺어졌는지 추적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로 말미암아 예안김씨는 200년 고향, 안동 도산(옛 예안禮安)을 떠나 영주로 이주했고, 처가살이와 더불어 파천황의 변화가 왔다.
처가살이는 일반적이었다. 재산 균등상속 때문이었다. 안동에서 영주로 이주한 또 한 집이 있다. 소고가문이 그렇다. 아버지 진사 박형朴珩이 문절공 동생 김홍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이거했고, 영주사람이 되었다. 농암이 진사를 유일遺逸로 나라에 천거할 당시에는 안동사람이었다, 퇴계는 만사를 했고, 부인 예안김씨 묘갈명도 지었다.
소고는 ‘榮有嘯皐 豊有錦溪’라 말처럼, 영주 최고의 인물이다. 소고가 퇴계를 만나 제자가 되기 전까지, 자신이 영주의 퇴계로 존재했다. 문인록에 오른 제자가 52명인데, 일대 쟁쟁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오늘의 영주가 있게 한 한 분이었다. 공교롭게도 금계와는 나이도 같고, 문과급제도 함께 했다. 소고가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고 했다. 그래서 금년 500주년 행사도 문중을 달리할 뿐 같이 한다.
소고뿐만 아니다. 7형제 모두 빼어났다. 박승문은 훈도, 박승건은 생원, 박승간은 소고와 함께 문과급제 했고, 박승준은 진사였다. 소고는 여섯째였다. 이로써 소고가문이 형성되었다. 소고가문은 문절공가문과 더불어 영주 최고의 가문으로 번창했다. 명촌 무섬을 공유하여 더욱 그런 상징성이 더해졌다.
그런 집이 또 한 집 있다. 농암 조카이며, 간재 이덕홍의 아버지인 이충량李忠樑이 소고의 종형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이주하였다. 간재는 영주에서 태어났고, 간재를 모신 오계서원도 안동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영주에 소재하고 있다.
간재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계문溪門의 고제高弟이다. 특별 사랑을 받았다. ‘간재艮齋’라는 호도 지어주었다. 그 만큼 빼어났기 때문이다. 바다를 가보지 않은 간재가 귀갑선도를 그렸으며, 퇴계의 명으로 혼천의, 선기옥형을 제작했다. ‘천문天文을 통달했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간재의 아들들도 그러했다. 맏아들 선오당 이시李蒔는 뛰어난 학자로 많은 제자를 두었다. 동생들인 이입李苙, 이강李茳, 이점李蒧, 이모李慕 등 이른 바 ‘초두 4형제’, 맏손자 이영구李榮久와 함께 ‘5숙질 문과급제’했고, 3형제가 같은 날 급제하여 오래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로써 간재가문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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