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와 탁청정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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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와 탁청정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와 탁청정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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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3회 작성일 23-08-1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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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가 ‘기동奇童’으로 불리어졌듯이, 같은 시대 천재들이 한꺼번에 태어났다. 문절공에 이어, 농암, 회재, 퇴계, 금계, 소고, 백암 등이 꽃을 피운 천재라면, 꽃을 피우지 못한 천재들도 있었다.

송재 이우李堣를 비롯하여, 권수익의 아들 권운權雲, 성재 금란수의 아들 금각琴恪, 간재 이덕홍의 아들 이강李茳 등이 그들이다.

송재는 송재 후손들이 “우리 선조가 10년만 더 사셨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인물이다. 49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이미 승지, 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49세 퇴계가 풍기군수에 있었음과 비교하면 여간 빠른 발신이 아닐 수 없다.

권운은 22세에 급제했는데, 원로들이 경연에서 임금과 문답하는 것을 ‘전적으로 권운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래서 장차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고 정승도 맡을 만하고, 한 시대를 교화시킬 수 있으며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 했지만, 불과 25세에 죽었다.

금각은 허균許筠의 형, 허봉이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했다. 저 유명한 ‘등왕각서’를 쓴 ‘왕발과도 비견 된다’고 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고도 했다. 금각은 18세에 요절했는데, 외삼촌인 월천 조목은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했다.

간재의 아들 손자 5숙질이 모두 재사였지만, 특히 이강은 “당시에 보기 드문 명경현사明經賢士의 재주가 있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도산서원에 월천 조목을 종향하는데 김중청과 더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대 천재 허균과도 매우 가까웠으니, 서로를 알아보는 안목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들 천재들은 문절공 가문의 뛰어난 DNA와 연관되고, 그 연장선에 금계가문이 존재하고 있다. 장수는 농암가문의 상상할 수 없는 장수 DNA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영주는 고려시대 안동을 압도했다. 국정을 좌우할 인물들이 속출했다. 따라서 안동에서 영주로 이주함은 전연 이상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선진지의 정착이었다. 그렇지만 영주의 위상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개국과 더불어 쇠락하기 시작 했고, 16세기에 오면 안동에 완전 역전 되었다. 흥망성쇠는 개인, 가문, 지역, 나라의 그 어는 것도 불변일 수 없다. ‘易’은 변함이고, 고대 전설적인 명 군주, 주나라 문왕이 지었다는『周易』은 그래서 인기가 있다.

영주에 금계가문이 있었다. 황유정 판서가 있었고, 그 주변에 정도전, 안축, 우팽 등 거물들이 있었다. 이들 존재를 두고, 안동에서 제일 먼저 문절공 가문이 금계 가문으로 들어갔고, 뒤따라 소고 가문이 문절공 가문에 들어갔고, 간재 가문이 소고 가문에 들어갔다. 멀리 김해에서 올라온 허찬도 갔다. 그렇지만 퇴계는 가지 않았다. 여건으로 보면 먼저 가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로써 안동 가문 일원이 영주 가문이 되었다. 영주 반가의 잦은 안동 혼인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퇴계는 이 모든 가문들을 다시 묶어 버렸다. 금계, 소고, 백암, 간재 등 모두 퇴계제자가 되었다, 그것도 두드러진 제자들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퇴계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금계, 소고가 그 역할을 했을 거라고.

문화유산 측면에서 좀 더 확대해보면, 한국 최고의 정자, 탁청정濯淸亭과 한국 최초 음식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을 탁청정 김유金綏가 짓고, 쓸 수 있었음은, 문절공가문의 막대한 도산 재산을 일시에 물려받음으로서 가능했다.

1544년 낙성한 탁청정은 당시부터 ‘화루華樓’라 했고, 김시찬이 쓴 중수기에 “선례가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先無華構”고 했다. 단청까지 있었는데, 정자라는 현판을 단 건물로는 이보다 앞서는 건물이 없을 것 같다. 퇴계가 “(탁청정의) 부엌에는 진미가 가득하고 독에는 술이 항상 가득하다”고 한 바 있는데, 그런 부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종증손녀, 즉 근시재 김해金垓의 따님이 영양군 석보의 석계 이시명李時明에게 출가했으니, 재취부인 정부인貞夫人 안동장씨(본명 張桂香)의『음식디미방』의 저술과도 연관된다. 정부인은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이었다.

탁청정의 부유는 문절공 가문 때문이었다. 문절공의 아들 김만균은 탁청정의 종고모부인데, 자녀 없이 죽으면서 그 제산을 모두 탁청정에게 주어버렸다. 탁청정은 재산 상속과 더불어 시양자侍養子가 되었고,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

탁청정의 맏며느리가 농암 따님이니, 농암가문의 장수 음식과도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퇴계가 참석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는 효도 잔치였고, 경로 잔치였고, 장수 잔치였다. ‘애일당구로회’는 농암종택 500년 전통이 되었다.

참고로, 농암가문의 장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농암을 중심으로 보면, 농암 89세, 아버지 이흠李欽 98세, 어머니 안동권씨 85세, 숙부 이균李鈞 99세, 조부 이효손李孝孫 84세, 조모 청주양씨 77세, 증조부 이파李坡 76세, 고조부 이헌李軒 84세였다.

동생 이현우李賢佑 91세, 이현준李賢俊 86세이며, 아들 이문량 84세, 이희량 65세, 이중량 79세, 이계량 83세, 이윤량 74세, 이숙량 74세이고, 조카인 이충량李忠樑 71세, 이수량李遂樑 89세이며, 이문량의 증손자 이영운李榮運 94세, 고손자 이양직李養直 82세였다.

외가도 장수였다. 외조부 권겸權謙 93세, 외숙부 권수익權受益 93세, 권수복權受福 73세, 외사촌 권구權矩 85세였다. 이미 소개한, 퇴계 조모 영양김씨(증조부 파의 외손녀)는 93세였다. 70세의 퇴계도 당시로는 장수였다. ‘人生七十古來稀’의 ‘稀’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1500년대 평균 년 령 80세, 그것도 7대 200여년에 걸쳐 계속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농암이 70세 고령에 노래자老萊子의 전설적인 ‘색동옷 춤’을 재현함 은 가문의 이런 장수 때문이었다.

필자는 지난해 <문절공 김담 탄신 600주년 기념 강의>에서 문절공 가계 계보를 도표로 분류한바 있다. 여기서 농암, 회재, 퇴계, 금계를 비롯하여 영주의 소고 박승임, 백암 김륵, 간재 이덕홍, 안동의 노송정 이계양, 송재 이우, 온계 이해, 월천 조목, 성재 금란수, 근시재 김해金垓, 개암 김령金坽 등이 모두 당내堂內의 촌수였음은 밝혔다. 그 글 일부를 다시 옮겨본다.

“기적의 문과급제가 이 무렵 속출했고, 몇 분은 국가적 인물로 발신했다. 능문能文, 능리能吏의 인물들이 춘산의 진달래처럼 한꺼번에 피어난 셈이었다. 안동, 도산 역사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영남 남인의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불천위不遷位’로 옹립되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인물들이 하나의 계보에 동시에 묶여있었던 셈이고, 동시에 각 성씨의 백세불천百世不遷하는 대표적 인물로 높이 추앙되었다.

이들 모두의 집이 이후 경북 유수의 ‘불천위종택’이 되어 5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 이어오고 있다. 지연, 혈연, 학연이 대를 이어 중첩해서 엮어지고 있다. 오늘 참석자 가운데도 조상들의 이런 저런 인연으로 모이신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지역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다. 안동문화권의 특징적 요소이며, 문화사적으로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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