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율곡집의 금계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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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1회 작성일 23-08-11 12:38본문
7. ‘秋山欲畫 澄江如鏡’
1)
퇴계에게 ‘선생’과 ‘공’의 구분함은 무슨 이유인가?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내려 왔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혹시 이를 언급한 선현들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아도 없다. 찾아 본 바 전연 없다. 이 점은 좀 미스터리 하다. 인문학적 현안에 명쾌했던 우리 조상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퇴계의 권위 때문인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연보年譜를 지었는데, 우복은 ‘愚伏鄭先生’이라 하고 서애를 ‘西厓柳文忠公’이라 하여, 양가 오랜 세월 현안이 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런 가운데도 혼인은 계속되었으니, 시비와 혼인은 분리된 인사였던 모양이다. 결국 연보 목판을 서애종택에 옮기는 것으로 결론 났다. 그 목판은 지금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인물 평가에 거침없는 율곡의 언급이 혹 있을까 찾아보아도 없다. 율곡의 평가는 날카롭고, 퇴계와 상반되는 점이 특징이다. 반대거나 양비론적이다. 정암, 회재, 화담, 고봉 등의 평가가 그렇다. 왜 그랬을까? 퇴계 최후의 인물 추천에 빠진 서운함 때문일까?
충재, 회재도 비교 평가한바 있는데, 그 글도 미묘하다. 두 분 모두 ‘공’이라 했고, ‘어떤 사람의 입’을 인용했는데, 그 어떤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퇴계를 지목한 것은 아닐까? 그 글은 이러하다.
“삼가 생각하건데, 사람을 볼 때 먼저 그 대절大節을 취한 뒤에 세세한 행동을 논하는 것이 옳다. 권공, 이공 두 분은 평소의 행검에 있어선 권공이 이공을 따르지 못하나, 화난에 임하여 항절하는데 있어서는 이공이 권공에게 양보해야 하리라. 어떤 이는 이공이 권공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원문 : 謹按。視人。先取其大節。然後可議其細行也。權李二公。平日行檢。權固不及於李。而臨難抗節。則李讓於權。或者以爲李優於權。吾不信也。
『율곡집』 ‘석담일기’
그렇다면 금기사항인가? 이 당연한 궁금함에 당연한 답변이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필자 또한 이 부분은 남겨 둘까 했지만, 무책임한 것 같아 몇 자 소견대로 써 본다. 오해 없기 바란다.
퇴계께서 비록 구분을 했다 하더라도 인물 자체의 평가는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행장 저술의 인물 선정은 이미 이 모든 표현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으며, 존경하는 분에게는 ‘공’과 ‘선생’을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금계집』을 보면, 금계가 퇴계에게 ‘영감令監의 회포’, ‘영감의 행차’ 등을 사용하여 ‘선생’과 동시에 쓰고 있다. 영감令監, 대감大監, 상감上監은 최고 존칭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 것이 ‘영공令公’, ‘상공相公’인데 극존칭이다.『농암집』을 보면 퇴계가 농암에게 선생과 ‘상공相公’을 동시에 쓰고 있다.
1572년, 퇴계 대상大祥에 율곡이 쓴 제문에 “공이 조복을 벗으시고”, “공이 역책易簀 하실 때” 등의 표현을 했다. 세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전거典據로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충재, 금계에게 사용한 ‘공’ 이란 표현은 이 경우 극존칭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선생’을 쓰지 않았을 뿐, 다른 존칭이 없다. 연장선에서 조금 더 추측해 보면, 충재는 ‘선생’의 학자적 이미지보다는 ‘대절大節’이란 ‘대정치가’의 의미가 더 강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충재행장에 “규암 송인수宋麟壽는 ‘권공은 재상 중에서도 진정한 재상입니다’ 하였고”, 다른 행간에는 “공公을 원상院相으로 삼으니, 놀라 말하기를, ‘저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심은 모기에게 산을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국사를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고 쓰여 있다. ‘재상 중의 재상宰相’과 ‘산을 지우는 국사國事’는 결국 정치가의 충재일 수밖에 없다. 모순이 폭발한 시대의 국정책임자, ‘원상院相’에게는 그런 표현이 더 적합한 것이 아니었을까.
행장 전문을 누비는 퇴계의 글도 그렇다. 대정치가 충재로 일관되어 있다. 일독해보기 바란다. 감동의 생애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충재는 대인 풍도의 강직한 정치가이지 단정한 선생 모습은 아니다. 나만의 느낌일까. 퇴계가 ‘선생’을 쓸 수 없었음이 글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호諡號는 어떤 측면에서 이런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암, 회재, 퇴계가 ‘문정文正’, ‘문원文元’, ‘문순文純’ 인데, 충재는 ‘충정忠定’이다. 충정은 “임금을 섬기는 데 절개를 다했으니 忠이고, 순수한 행실을 지켜 변하지 않았으니 定”이라 했다. 충재에 대한 나라 차원의 평가는 역시 학자는 아니었다. 한 마디로 ‘忠臣’이었다.
그렇지만 네 분 모두 ‘증 영의정’으로, 국가적 평가는 격이 같다. 더 오를 수 없는 명예의 정점에 올랐다. 품계 역시 네 분 모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로 같다. 최고의 품계이며, 증직 전체 글자 또한 똑같다. 금계에게 ‘선생’ 으로 규정하지 못했음도 차마 그렇게 쓰지 못한 사회적 규범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어느 말처럼, “제자에게 어찌 선생이라 하느냐”의 지적이 그것이다.
이렇게 쓴다고 해서, 그 구분과 기준을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무엇인가 명쾌한 기준이 있었을 것 같다. 퇴계선생에게 “왜 그렇게 쓰셨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다면, 바로 답변을 주셨겠지만 지금 그럴 수 없다.
아주 쉽게 생각하면, 정3품 당상관 이상 종2품까지가 ‘영감’이고, 정2품 이상은 ‘대감’이다. 그 위에 ‘상감’이 있다. 영감은 ‘영공令公’, 대감은 ‘상공相公’, 삼정승은 별칭 ‘삼공三公’이라 했으니, 公은 그 용어를 그대로 쓴 것일 수도 있다. 금계는 정3품 당하관 성주목사였지만, 퇴계에게는 이미 영감을 넘은 것은 아니었을까.
좀 더 생각해본다면, 역시 도학적 기준이 엄격하게 적용된 것이 아니었을까. 퇴계가 숙부 송재와 중형 온계의 행장을 쓰지 않았음을 상기해볼 수도 있다. 아버지나 다름없고, 아깝게 단명한 관찰사 송재와 사화에 억울하게 피화된 대사헌 온계의 행장은 왜 쓰지 않았을까.
송재는 진성이씨 가문의 길을 낸 분이며, 온계는 후일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린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더 먼저, 더 정성껏 써야하지 않았을까. 생애 이력도 가장 잘 안다. 추억도 많다. 시간도 얼마든지 있었다.
퇴계는 송재의 연보年譜와 묘갈지墓碣識를 지었고, 온계는 묘지명墓誌銘과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추모 글로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썼다. 그렇지만 행장은 쓰지 않았다. 퇴계가 지친至親 두 분 행장을 쓰지 않았음은 도학자적 기준 말고는 다른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2)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을 반석에 올린 분이다. 이사장 9년, 3기연임 하고 있고, 이근필李根必 종손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고, 수많은 인사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전임 기획예산처장관 신분으로, ‘어느 장관의 멋진 2막 인생’이라 생각되는 그런 수련원 생활을 하고 있다.
종손께서 ‘현존 3인의 진정한 선비’의 한 분이라 하시는데, 나는 어느 사석에서 “오늘의 퇴계와 퇴계종택이 있도록 한 3인의 한 분”이라 했다. 두 분은 월천 조목과 창설재 권두경이라 했다. 외람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원장은 지금 빗 글 저술의 적임으로 손색없다.
오늘 기념비를 제막했다. 비단 같은 개울- 錦溪의 개울가에 세웠다. 비단 개울에는 비단 같은 신선 금계가 있고, 거기 꼭 있어야 할 정자가 있다. ‘금선정錦仙亭’이다.
천하명산 소백산 아래 천하명소 금계가 없다면 어찌 명산이랴 하랴. 천하계곡 금계에 천하명소 금선정이 없다면 어찌 명곡이랴 하랴. 천하명소 금계에 천하명인 금계가 없다면 어찌 명소라 하겠는가! 명산은 명인이 있어 명산이 되는 법! 소백산은 금계가 있어 명산이 되고, 금계는 천하명인 금계가 있어 명곡이 되었다. 거기 기념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450년 전 금계 개울가, 금계의 초가를 찾아간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제목이 ‘금계 초가의 시를 차운하여, ’행록‘ 뒤에 적다(次錦溪茅齋韻書行錄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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