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집 외집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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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집 외집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금계집 외집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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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9회 작성일 23-08-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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驂鸞無術覓三丘 난 새 수레 맬 수 없어 소백에 들어오니

且向雲間漱石流 구름사이, 돌로 양치하고 물로 베개하리

好是風流騘馬客 좋을시구! 풍류 아는 총마 탄 나그네

錦溪時到濯塵愁 때로 금계로 돌아와 묵은 수심 씻으리

금계의 써 둔 원운은 이렇다. 제목이 ‘금계 초가에서 쉬며 읊다(錦溪茅齋憩吟)’이다.

松竹參差擁一丘 언덕을 감싼 소나무, 대나무 듬성듬성

三春錦水夢中流 봄 금계 물, 꿈속에 흐르네

自臨釣石灑然濯 낚시터에 나가 가슴을 씻어내니

魚鳥見人應解愁 물고기, 새들 나를 보고 수심 풀겠지

금계 초가가 있어 퇴계가 갔고, 그 초가가 있어 금선정이 세워졌으며, 금선정이 있어 오늘 추모비가 세워졌다. 빗 글 역시 그렇게 쓰여 졌다. 퇴계의 ‘선생’ 표현은 “사제 간의 사랑과 곡진한 학문적 동지”의 압축 표현이라고.

다시 찾기 어려운 단 하나의 단어였다. 두 분 사이는 학문적 동지애가 있었고, 그 ‘동지애’는 엄혹한 시대를 함께한 진정한 동반자의 모습 이었다. 동지를 잃은 퇴계가, 그 동지에게 ‘선생’이라 표현함은 전연 어색할 것이 없다. 순간 두 분 사이, 나이 차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으랴!

퇴계는 장례를 선도하고, 강학 공간을 마련했으며, 유고 간행을 서둘렀다. 완벽한 뒷수습이며, ‘행장저술’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요약된 ‘평전’으로, 요절한 동지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고, 최대의 부조였다.

퇴계 안목에 금계는 자신은 물론, 앞서 거론한 인물과 같은 반열에 있었다. 어쩌면 공자孔子가 요절한 후계자 안회顔回의 일을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났구나, 끝났구나, 애통하고, 애통하다”하는 제문 표현이 공자의 안회 죽음을 대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행장 저술은 이를 다시 반증하는 일이며, 그 글의 단면들은 사실 퇴계 자신의 인생 단면이기도 했다.

겸암 류운룡柳雲龍의 ‘금양정사완호기문’의 발문에, 금계의 죽음은 정자程子의 학문이 주자朱子로 이어지고, 공자의 학문이 안회로 이어지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고 했다. 그 글은 이러하다.

“금계선생은 퇴계 문하에 종유하여 만년 용공用功이 가장 친절하였다. 만일 하늘이 수명을 좀 더 연장해 주었다면, 나는 ‘용문龍門의 울림’이 바로 선생에게 이어졌음을 의심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이 나를 망친다’는 탄식이 갑자기 일어나게 했으니, 퇴계의 애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는가.”

원문: 錦溪先生從遊退溪之門。晩年用功。最爲親切。若使天假之年。吾知龍門之響。正續於先生無疑矣。不幸早世。天喪之歎遽發。退溪之慟惜。庸有極乎。

퇴계에게 금계는 분신 같은 동지였는지도 모른다. 가령 ‘溪庄喜黃錦溪惠訪 追寄’ (『도산전서』별집, 권1, 시) 시詩의 제목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번역하면, “개울가 집에 황금계의 은혜로운 방문을 기뻐하며, 미루어 시를 써서 부친다” 이다. 제자에게 ‘惠訪’이라 쓰기는 쉽지 않다. ‘惠存’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더욱 그렇다.

퇴계 인생에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일까.『주자전서』의 첫 만남이 아닐까. 『주자전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인생이 한 길로 정리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신명처럼 받들었다(敬信如神明)'고 했다. 그 만남에서 ’몇 번이나 함께 눈물 흘린‘ 감격의 동지가 금계였다. 제자와는, 제자라면 그럴 수는 없다.

퇴계에게 질문한 『근사록近思錄』의 문목問目이 ‘上退溪先生問目 近思錄’인데, 이 문목은 금계의 학문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금계는『근사록』의 내용과 요점을 이미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고인의 영결식장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고 있다. 영결의 말, 제문祭文에,

托後事於過房兮 뒷일은 양아들에게 맡기고

留學訣於損友 학문의 진수는 나에게 맡겼네

금계는 시인이며 문장가이며 학자였다. 퇴계의 한없는 존경은 당연하다. 자신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동지적 관계의 허여許與는 거기에 그림 같은 외모가 어우러진 총체적 예우였다. 미려한 문장의 ‘단양진폐소’는 이 모든 것이 함축된 총체이다. 금계는 퇴계에게 자신에 버금가는 뛰어난 도학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라 했다. 완전한 인정이었다. 적어도 퇴계에게 금계는 그런 인물이었다.

다음 글은 금계가 퇴계에게 쓴 편지 안부인데, 글의 흐름이 사제 간에 주고받는 사연 같지 않다. 높이 날아가는 학의 모습 같다. 퇴계가 만사에서 “문장은 세속을 넘었다(穎脫爲文出俗姿)” 는 표현 그대로다. 두 분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서 마음을 주고받고 있는 가를 엿보게 하는 단서가 된다. 글은 이러하다.

“가을 산은 그림 같아지려 하고, 맑은 강은 거울 같은데, 멀리서 즐거움이 온전하고 편안히 수양하심을 생각하니 기뻐서 발돋움을 할 지경입니다.”

원문 : 秋山欲畫。澄江如鏡。遙想樂全宴養。欣跂欣跂。

금계집 외집 제7권 / 서(書) 〔上退溪先生書〕

결국 퇴계가 금계 행장을 쓴 이유는 4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6살의 연하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부분을 앞서거나 독보적이었다.

첫째는 빼어닌 문학적 재능이다. 생을 마감할 때 이미 1000여수의 시를 지었다. 엄청난 분량이다. 이런 학자 없다. 둘쩨는『주자서절요』간행이다. 퇴계가 서문까지 쓰고 주저하는 사이 금계는 발문을 써서 간행했다. 세쩨는 서당, 서원창건 운동이다. 퇴계가 48세 백운동서원 사액 청원을 하고, 1570년 70세에 역동서원의 창건운동을 전개했음에 비해 금계는 10년 전 1560년 영봉서원을 창건했다. 넷째는 탁월한 목민관이다. ‘단양진폐소’의 상소문은 적폐가 쌓인 단양의 전임 고을원으로 후임 제자의 과감한 상소는 퇴계를 감동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개인적 친밀감과 문학적 교감, 무엇보다도 요절은 퇴계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다. 그런 요인들은 ‘도학’과 관련되어 ‘금계황공행장’이 지어졌으며, 그 글의 저술은 퇴계가 금계에게 해 줄 수 있는 문학적, 인간적 동지에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짧은 생애, 한강 정구鄭逑, 백암 김륵金玏 등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금계는 선생이 되었다. 퇴계 인생을 생각할 때, 금계의 단명은 정말 아쉽고 아깝다. 퇴계 4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한강이 묘소를 참배하고 쓴 제문 한 구절은 이러하다.

“선생은 우리 고을(성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시어 후생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선비들이 오늘날까지도 그 교화에 감격하여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저는 선생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받았던지라 더욱 그러합니다. 저를 인정해주시고 사랑하신 그 뜻은 각별하셨습니다...평생 선생의 덕을 흠모하고 뜻을 받들어 감히 그 기대를 실추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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