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종손 인사 맺음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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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회 작성일 23-08-11 12:40본문
死別呑聲動五年 사별하여 목이 멘 지 5년이 흘렀건만
夢中風彩尙依然 꿈속에도 풍채는 오히려 의연하여라
山陽已愴隣吹笛 산양에서 이웃 피리소리에 이미 슬퍼졌는데
遼海還驚鶴幻仙 요해에서 학으로 환생한 신선에 다시 놀랐네
墓左靑蒭違漬酒 묘소 왼쪽 푸른 풀이 적시는 술을 저버려
琴中白雪斷哀絃 거문고 속, ‘백설가’는 애절한 현을 끊었네
分明表我長相憶 분명 내게 길이 생각하자는 뜻 표하셨음에
不信詩魂隔九泉 시혼이 구천을 격해 있다는 것 믿지 못하겠네
신재는 농암과도 친밀했다. 점석, 청량산, 용수사로 이어지는 풍류 흥취는 신선을 방불 하게 한다. 명작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을 짓고, 발문을 농암, 퇴계에게 동시에 요청한 분이 신재이다. 신재, 퇴계, 금계가 농암 시를 함께 차운하기도 했다. 퇴계의 농암, 금계 행장은 이런 만남에서 이미 쓰여 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시를 보면, 금계는 자부하고 있다. 자신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시는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보杜甫를 언급하며, 글에 밀리지 않으니 양보할 생각도 별로 없다. 신선을 모르는 자, 신선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세 분 모두, 자신들은 신선의 경지에 올랐고, ‘분강점석의 유상(汾江簟石之遊)’은 전설의 ‘유상곡수의 모임(流觴曲水之會)’을 구현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부가가 지어지고 불리어진 이 점석의 유상은 정영 신선들의 향연이었다. 이 날 농암은 81세, 퇴계 47세, 금계 31세였다.
퇴계가 농암행장을 저술할 때, 금계와 의논했고, 많은 초고를 제공받았다. 어느 부분 합작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농암이 몰 하자, 금계는 ‘농암선생묘지명聾巖先生墓誌銘’을 썼는데, 그 글이 행장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별본 행장이라 할 만큼 역작이다.
금계는 농암과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농암 상소문’ 세 편을 대신해서 썼다. ‘단양진폐소’ 처럼 명문이다. 생일에 지어 올린 장편 “龍山高效歐陽永叔廬山高壽聾巖李相公生辰”의 시는 최고의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금계가 농암이 은거하던 용수산龍壽山(현 용두산)을 구양수가 절찬한 중국의 명산 여산廬山을 찬양하여 지은 천하 명시, '여산고廬山高'를 따라 지어 농암의 생일 선물로 올렸다. 농암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전편 시어에 절절이 담겨있다. 1551년 7월 29일, 생일 축수 잔치에 참석하여 썼다. 금계 나이 34세였다.
농암 글을 모아 필사해서 묶었는데, 그 책이『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보물1202호)이다. 뿐만 아니다. 금계는 장인, 처삼촌 등 여러 분과도 많은 시문들을 주고받았다. 지금『금계집』을 살펴보면, 금계는 그 누구와도 시문을 주고받은 명랑하며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농암종택에서 당시 창균 김기보와 더불어 ‘두 서방’이라 했다는 전언은 사실일 것 같다. 창균은 처가살이를 했고, 금계도 상당 기간 처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금계와 퇴계의 뜨거운 관계처럼, 34세 차이의 퇴계와 농암도 그러했고, 50세 차이의 금계와 농암도 다르지 않았다. 세 분은 더불어 지기知己가 되었고, 지음知音이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추모하고, 추억했다. 그것도 영원에 이르도록 했다. 금계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농암과는 38세, 퇴계와는 48세 이전의 일이었다. ’망년지우忘年之友‘를 넘어서는, 저 피안의 만남을 현실로 이루었다. 그래서 금계의 예언처럼 전설이 되었다. 지금 누구도 이런 만남을 이룰 수 없다. 퇴계의 금계행장 저술은 사건이 아니었으며, 금계가 농암을 모신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음도 우연이 아니었다.
금계를 가장 잘 알고 있고, 일생을 경쟁한 벗이며, 몰후에도 함께 거론되는 소고 박승임은 이런 평을 한 바 있다.
留名滿世 금계의 이름이 세상에 가득하게 남았음은,
遺愛人民 오직 - 백성에게 사랑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름을 세상에 남겼는데, 온통 사랑으로 남겼다”고 했다. 참으로 온당한 평가이고,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더 이상 수사修辭하기 어렵다. 죽마고우의 이 한마디 말로써, 금계의 인생은 완성되었다. 금계는 이제 ‘선생’이 되시었다.
3)
금계 행장은 퇴계께서 쓰셨다. 다시 쓴다고 함은 매우 외람되다. 쓴다고 쓰는 나의 이런 글은 화사첨족畵蛇添足에 불과하다. 그러나 500년이 흐른 지금, 금계는 다시 평가되어야 된다. 퇴계의 표현처럼, 금계는 ‘금계선생’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대접 받음이 마땅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후인들의 도리이다.
이 글은 금계에 대한 그런 대접과 도리 차원에서 지어졌다. 그렇지만 조금도 과장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문헌의 고증된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런 자세야 말로 선현들에 대한 존경의 작은 보답일 수 있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불변의 당위이다.
일대기를 쓴다는 것은 어렵다. 한 문장으로 쓴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글은 그런 흉내를 낸 글일 뿐, 능력 밖이고, 이해의 편의상 몇 항으로 분류했다. 따라서 이 글은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비 제막>에, -당시에 쓰여 진 일대기, 즉 ‘행장行狀’ 이라는 글을 다시 한 번 일독하고 상기하는 정도의 내용으로, -종손과 문중의 요청에 미력하게나마 부응하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써서 올리고자 한다.
금계께서 그 옛 그 어느 날, 농암종택 긍구당肯構堂 마루에서『애일당구경별록』을 쓰고 작첩하는 모습을 회상하며, 삼가 추모한다. 그리고 이해를 돕기 위해 퇴계의 행장, 제문, 만사, 금양정사완호기문과 단양진폐소를 원문과 함께 아래 소개한다.
그리고 이 순간, 한 마디 더 쓰겠다. 그것은 이 원고가 쓰여 지는 동안 황재천 종손과 메일 20회 이상, 전화 20회 이상 주고받았다. 나는 시간이 없었고, 종손은 노종부께서 갑자기 위중하시어 안동 어느 병원에 입원하여 매일 출퇴근 간호를 하셨다. 밤에 글을 쓰며 문의 했고, 종손은 막힘없이 자료를 보내 주셨고, 항상 너그럽게 말씀하셨다. 추진위원회의 많은 일도 세밀하게 뒷받침 하고 계셨다. 나는 종손께서 그런 학식이 있는 줄 몰랐는데, 차츰 의견을 교환해보니 훌륭한 인품을 지니셨고, 금계에 관해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었다. 영주시사에 빠진 영주지역 이야기를 담은 책인 『가담옥설』을 주집필하심도 이런 뛰어난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말씀은 “나는 이번 행사에 어느 위치에 있어도 상관없으며, 오직 행사만 잘 진행되면 아무래도 된다” 하셨다. 금계종손다운 말씀이라 생각되어 아울러 부기해둔다.
丁酉(2017年) 九月 日, 文學博士 永川 李性源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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