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선생의 금계행장-II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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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6회 작성일 23-08-11 12:28본문
“아아, 슬프다 금계여!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영결의 말이 부고와 함께 이를 줄을! 실성하여 오래 부르짖으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흐르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아 감이 어찌 이리도 빠르게 하십니까! 사실인가, 꿈인가, 너무 슬퍼 목이 메여, 말을 다 할 수 없고, 정을 다 억누를 수 없네. 아아, 슬프다 금계여!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으니, 끝났구나, 끝났구나! 애통하고, 애통하다!”원문: 嗟嗟錦溪 而至此耶 何意訣言 與訃偕至 失聲長號 傾水老淚 天奪斯人 曷其亟耶 眞耶夢耶 惝恍哽塞 言不暇悉 情不能裁 嗟嗟錦溪 一去難回 已矣已矣 哀哉哀哉
관상棺上에 명정銘旌을 썼다. 이런 일도 없었지만, 쓴 글은 더욱 놀랍다. ‘嗚呼亡友錦溪黃先生’이라 썼다. 번역하면, “아아 슬프다, 나의 벗 금계 황 선생이여”이다. 이 표현은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다.『평해황씨 족보』의 기록은 이러하다.
“부음을 듣고 선생께서 신위를 만들어 곡을 했다. 장례에 관 위에 ‘오호망우금계황선생’라 썼다. 빗 돌 글씨를 쓰고, 유고 ‘내집 2권’을 편집했으며, 행장을 저술했다.”
원문: 訃聞 先生爲位而哭之 及葬 手書棺上曰 嗚呼亡友錦溪黃先生 書碣面 繕寫內集二卷 撰行狀”
금계는 퇴계 제자이다. 문인록에 이름이 있다. 적지 않은 만남과 긴밀한 학문적 수수授受 사실도 있다. 나이도 16살 차이다. ‘선생’이라고 하긴 정말 어렵다. 선생이 어찌 제자에게 ‘선생’이라 하는가. ‘망우亡友’도 쉬운 표현이 아니다. 관행이라면 ‘平海黃公錦溪之柩’라 쓰든지, 아니면 ‘星州牧使平海黃公之柩’ 정도가 아닐까. 퇴계의 놀라운 처신은 후일 조정에 까지 알려져 영원한 ‘국가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기록은 이러하다.
“고 목사 신 황준량은 선정신 이황의 고제입니다. 도학을 일찍이 듣고 그 실천이 독실하였으며, 역학의 근원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주자의 책을 간행하여 반포했으며, 학생들을 교육시켜 유풍을 크게 떨치게 하였습니다. 그가 죽음에 이르자 선정께서 그 명정에 ‘선생’이라고 썼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곧바로 선생이라 일컬은 것은 진실로 사문斯文 초유의 일입니다. (그런 연유로) 영남 선비들은 지금까지도 높이 우러러 존모하고 있습니다.”
원문: 故牧使臣黃俊良, 先正臣李滉高弟也。聞道旣早, 踐履且篤, 推究易學之源, 刊布晦庵之書, 敎授生徒, 儒風大振。及其歿也, 先正, 以先生題其旌, 師門之於弟子, 直稱
先生, 是誠斯文初有之事也。嶺外人士, 至今景仰而尊慕,
『承政院日記』-고종 3년 10월 30일 을묘, 1866년
이어서 빗돌 글씨, ‘錦溪黃公之墓’도 썼고, 바로 행장行狀을 짓기 시작했다. 금계 죽음이 1663년 3월인데 행장은 12월 완성되었다. 9개월 쉼 없이 썼다. 작정하고 썼다. 이런 연유로 금계는 농암처럼 가장家狀이 없다.
제자 행장은 없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황공黃公’이라 함도 어렵다. 곡 써야했다면 ‘黃君’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공公’이란 표현은 극존칭이다. 이제까지 그 누구의 죽음에도 없는 일이었다. 모든 과정이 파격적이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일도 놀라움의 연속이다. 금계 원고가 간행되도록 했다. 발문을 28세의 이산해李山海에게 부탁하는 세심함까지 보여 주고 있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李之蕃이 금계와 친했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쓰라는 무언의 주문이었다. 그 결과, 3년만인 1566년 『금계집』 초간본이 간행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금계가 생전 기획했던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완성토록 했다. 1566년 ‘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을 지어 풍기군수 조완벽에 청원하며, 승려들로 하여금 부역을 면제하고 정사를 수호 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금계의 강학정신이 계승되도록 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런 사연들이 응축되어 지금 금양정사 주변 욱양단소郁陽壇所에 퇴계비석과 금계비석이 나란히 함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생전 모습 그대로다. 마치 퇴계 몰후, 장례절차와 도산서원 건립과 『도산전서』간행을 주도했던 월천 조목趙穆이 도산서원에 유일하게 종향된 결과처럼 말이다. 그리고 탄신 500주년이 되는 오늘, 도산서원 김병일金炳日 원장이 기념 빗 글을 쓰는 인연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2)
금년 5월, 나는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 모임이 이곳 금양정사에서 있어 참석했다. 그때 귀로에 금계錦溪의 개울가, 금선정錦仙亭 옆 아담한 터에 새로 세워진 빗돌을 둘러보고 글을 읽어 보았는데, ‘학문적 동지’라는 말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 대문은 이러했다.
“퇴계선생은 그의 銘旌에 先生이라고 쓸 정도로 예우했을 뿐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여 조금이나마 애통함을 덜고자 직접 行狀을 쓰고, 두 차례의 祭文을 지어 그의 일생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亡友라 칭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문학이 뛰어나고 소중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손수 詩文을 교열하고 문집의 편차를 정하여 간행을 서둘렀다. 또한 제자가 만년에 못다 이룬 錦陽精舍를 관리할 승려의 부역을 면제해주고, 精舍를 안전하게 수호케 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 간의 사랑이요 곡진한 학문적 동지가 아닌가.”
그런데 논의의 중심 단어, ‘先生’ 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선생’이 누구인가? 이 개념은 언재 확립되었는가? 그런데 찾아보니 뜻밖에 사용이 적다. 통일신라시대까지는 강수强首선생, 백결百結선생 정도이다. 그 후에 별다른 사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 퇴계의 ‘선생’ 사용이 선행은 아니지만, 퇴계가 씀으로써 그 권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사용되는 ‘흔한 선생’은 조선시대에는 없었던 개념이고, ‘선생님’이란 존칭은 어디에도 없는 존칭이었다.
강수와 백결이 선생이 된 이유는 이렇다. 강수는 유학자로, 당나라에서 온 국서를 명쾌히 해석하여 왕이 ‘강수선생’이라고 했고, 백결은 출신이 한미하고 가난했지만, 거문고를 즐기며 세상사를 초연하여 사람들이 ‘백결선생’이라 했다.
이로 보면, 선생이란 국왕을 자문할 만한 인물이거나, 재야의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 등에게 붙여진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당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에 붙여진 최상의 존칭이었다.
퇴계는 새삼스럽게 왜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일까? 퇴계의 ‘선생 지칭’은 하나의 화두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500년이 흐르는 동안 그 누구도 이를 설명한 사람이 없음은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왜 그럴까?
역설적이지만 퇴계가 ‘퇴계선생’이 되었음도 위 4분의 선생 지칭과 더불어 더욱 굳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선생’은 거의 사문화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율곡이 퇴계 제문祭文에 ‘公’이라 하고, ‘선생’이라 하지 않았음도 그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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