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선생의 금계집 간행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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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2회 작성일 23-08-11 12:28본문
5. “주자 책을 함께 읽었으며, 몇 번이고 같이 눈물 흘렸다“
1)
인간 친애의 궁극은 무엇인가. 추억이다. 아름답게, 알뜰하게 추억하는 것이 궁극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이고, 최고의 예우이다.
퇴계는 금계 죽음을 그렇게 추억했다. 사랑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바로 금계 행장이 지어진 연유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퇴계 슬픔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금계는 모든 면이 앞섰다. 우선 과거부터 그렇다. 21세 생원 합격했고, 24세에 문과급제 했다. 을과 2등이니, 33명 가운데 5등이었다. 1540년 4월 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있었던 일로, 소고 박승임朴承任과 입암 류중영柳仲郢 등이 동방합격 했다.
문과급제 연령을 보면, 농암 32세, 충재 30세, 정암 34세, 퇴계 34세로 당시 과거 평균연령이 36세였다. 신동이라 불린 서애가 25세였고, 회재가 24세였다. 퇴계는 24세까지 3번의 과거낙방이 있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퇴계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다.
문과급제 한 많은 선현들을 ‘신동神童’이라 했는데, 금계는 ‘기동奇童’이라 했으니 그럴 만 했다. 행장 기록도 그러하다.
“일찍 문자를 터득하여 말을 하면 곧 남들을 놀라게 하여 ‘기동’으로 불리었다. 18세에 예조에 나가 시험을 보았는데, 시험관이 공의 책문策文을 보고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 이로부터 문명이 자자했으며, 시험을 볼 때마다 언제나 남보다 앞섰다.”
‘문명文名’은 글의 명성인데, 금계의 글 명성은 자자했다. 그 ‘자자함’을 자세히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퇴계였다. 왜냐하면 퇴계와는 생애 마지막까지 문학적 교류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행장에 “임종하기 하루 전날 황滉에게 편지로 영결을 고했는데, 사의辭意가 청신淸新하여 평일과 다름없었다.”고 했다. 감담상조肝膽相照는 이 경우, 꼭 맞는 말이었다.
퇴계가 계상溪上으로 금계를 맞이하여 지은 시 한수는 그런 사정을 엿보게 한다. 제목이 “퇴계 초가에 황금계가 내방했다(退溪草屋黃錦溪來訪)”이다. 퇴계 개울가에 막걸리 한잔 앞에 놓고 학문을 토론하는 두 분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이 시는 퇴계가 금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높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금계는 제자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溪上逢君叩所疑 냇가에서 그대 만나 궁금한 점 토의하며
濁醪聊復爲君持 막걸리 한 사발, 그대 위해 준비했네.
天公卻恨梅花晩 하늘이 매화 늦게 피게 할까 걱정 했는데
故遣斯須雪滿枝 일부러 잠깐 사이 가지마다 눈꽃 피어 주었네.
퇴계의 인품 가운데 가장 빼어난 면이 인간관계이다. 대화가 되고 학문이 통하면 연령의 고하를 넘어 사귀는 점이다. 농암은 34세 연장이고, 율곡은 35세 연하이다. 상하 교유 폭이 70세에 이른다. 농암 1467년, 퇴계 1501년, 금계 1517년, 고봉 1527년, 율곡은 1536년 출생이니, 고봉 기대승은 26세 연하였다.
1559년, 32세 갓 급제한 고봉이 58세의 성균관대사성, 즉 지금의 서울대학교총장에게 질의하여 1566년까지 8년, 114통의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 편지들이 결국 ‘한국 성리학의 꽃’이 되었다.
금계는 고봉과 흡사하다. 고봉이 편지로 교류했다면, 금계는 시로 교류함이 다른 점이다. 당시 누구도 금계만큼의 다작은 없다. 시가 천여 수(정확하게는 984수)에 이른다. 그 상당수가 퇴계와 주고받은 시다. 한문 용어로는 ‘수창시酬唱詩’라 한다. 시가 안부고, 안부가 곧 시였다. 숨이 넘어가는 전날도 퇴계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거의 ‘한국 시의 꽃’이라 할만하다.
사람들은 성리학의 고답적인 학술적 성과만 말하지, 이 수창시의 말할 수 없는 애잔한 인정의 세계는 간과한다. 삶은 과연 무엇인가? 천재박명인지 고봉 46세, 금계 47세, 율곡은 49세에 타계했다. 퇴계 인생의 시작 즈음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금계를 “원숙한 학문경지에 들어선 인물”이라 다시 언급했다. 대단한 평가이다. 증거는 문집이고, 그 평가가 금계 문집 간행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우리는『금계집』의 빠른 간행과 완벽한 간행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계집』은 퇴계의 편차 정리로, 1566년 단양군수 손여성이 간행했다. ‘단양군수 시절의 은공 때문’이라 했다. ‘단양진폐소’로 단양군의 10년 세금탕감에 대한 보답이다. 1584년 단양군수 황응규는 이 초간본을 보완하여 다시 간행했다. 전임 고을원의 치적을 후임들이 군 차원에서 계속해서 추모했다. ‘빠르고 완벽한 간행’은 이렇게 되었는데, 거의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문집간행은 어렵다. 경비 때문에 엄두를 못 낸다. 인물이어야 되고, 인물도 쉽지 않았다. ‘일고逸稿’ 로 남은 많은 문집이 이를 증명한다. 연멸되기 쉬운 것이 글이고, 임진왜란 이전의 글은 더욱 그러했다. 100년 만의 간행도 쉽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많은 원고 분실이 있었으며, 그 위에 글의 선별 간행이 이루어졌으므로 매우 축소되어 나온다.
이뿐만 아니다. 개별 글 자체가 다시 첨삭添削되어 편집된다. 후인들이 보기에 좋은 글자와 좋은 단어, 혹은 좋은 구절로 바뀌기도 한다. 지금 발견 되는 친필 시나 글을 원문을 보면 많은 글이 수정되거나 가감되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퇴계가 금계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보면, “前寄帖正緣汨汨 未假下筆 秋凉多愛 客中所得拙句 草呈 一笑 壬子仲秋念二 滉”의 구절이 편지 마지막에 있는데,『도산전서』(속집 권4, 서, 답황중거)에는 ‘秋凉多愛’만 남아 있다.
번역하면, “전에 보내주신 시첩을 바빠서 아직까지 마치지를 못했습니다. 가을이 왔으니 많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객중에 얻은 시구를 보내드리니, 한 번 웃으시기 바랍니다. 1552년 8월 22일, 황”이다. 모든 글이 이런 첨삭 과정을 거쳐 재편집되었다. 필화筆禍가 예상되는 글은 수없이 가감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겨우겨우 기적적으로 간행된 것이 오늘날의 목판 문집이다.
『농암집』은 몰 후 110년 뒤인 1665년, 『정암집』은 166년 뒤인 1683년, 『충재집』은 123년 뒤인 1671년 간행되었다, 가장 빠른『회재집』이 23년 뒤인 1575년이고, 거국적 물력이 투입된『퇴계집』은 30년 뒤인 1600년이다. 그 만큼 문집 간행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그토록 『금계집』간행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이 물음의 연장선에 ‘행장 저술’의 답안도 아울러 내재되어 있다. 두 가지 정도 그 연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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