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퇴계선생의 금계집 간행-III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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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23-08-11 12:29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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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금계집』과 관련이다. 우선 분량이 엄청나다. 내집內集 4권, 외집外集 9권, 합 13권 5책으로, 온갖 장르의 글을 남겼다. 기 조사에 의하면, 내집 권1∼3에 시 277수, 권4·5에 잡저로 기 2편, 서 10편, 제문 1편. 소 1편, 변 1편, 발1편 상량문 1편 등 모두 17편이고, 외집은 권 1∼6에 시 707수, 권7·8에 소 2편, 전 3편, 서 19편, 잡저 26편, 제문 2편, 묘지명 2편, 대책 2편, 권9는 부록으로 행장 1편, 제문 5편, 반사 2수, 기문 2편이다.
대단한 분량하다. 퇴계 그 어느 제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 47세 죽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저술이다. 서두에서 퇴계는 ‘초인적 저술을 했다’고 했지만, 금계는 그것을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1663년, 퇴계가 행장을 저술할 때 유고의 존재를 알았다. 그래서 행장 말미에 “공이 지은 문집 2권과 시집 2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公所著文集二卷 詩集二卷 藏于家)”고 마치 특이사항처럼 기록했다. 퇴계는 이 유고를 목격하고 금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았을까. 마치 회재 유고를 보고 감동하여 ‘단 한 뿐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왜냐하면 ‘문헌’은 문명국의 건설에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사輓詞는 추모노래 인데, 가장 임팩트 한 사연을 싣는다. 퇴계의 금계 만사에 “주자 책을 함께 읽었으며, 몇 번이고 같이 눈물 흘렸다“고 했다. 원문은 ‘朱書每與人同讀 幾憶平生淚共流’이다. 그리고 이어 “문장은 세속 인물을 벗어났으나, 어찌 하늘이 이런 운명을 주었나(穎脫爲文出俗姿 天胡賦命獨多奇)” 였다. 퇴계의 금계 인식은 이 두 구절에 함축되어 있고, 행장저술 목적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퇴계에게 금계는 “주자 책을 읽고, 함께 눈물 흘린 동지”이다. 주목되는 것은 역시 ‘주자 책’이다. ‘주자 책’은 이미 거론한 바,『주자전서』이다. 퇴계가 이 책 속의 ‘편지 글’ 3분의 1정도를 선별하여 묶은 책이『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이다. 학생교육을 위한 요점정리 책이다. 1558년 서문까지 써 둔 책이었다. 숙원 사업이었지 만 출판은 주저했다. 과연 사람들이 그 책으로 공부를 하려고 하겠는가라는 걱정이었다.
그래서『주자서절요』편찬과 관련하여 금계에게, “그렇다면 이 책을 간행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읽으려 하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然則雖使印出。其如人不肯讀何『도산전서』‘答黃仲擧’, 別紙)” 라고 했다.
이를 금계가 간행했다. 1561년, 성주에서 자신이 발문을 써서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과감하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퇴계는 주저하고, 학생들은 구경조차 못한 책을 간행까지 했다. 금계는 이때 퇴계에게 서문 부탁을 했으니, 퇴계보다도 한 발 앞서가고 있었다. “함께 읽고 눈물을 흘린 감동의 책”은 그렇게 간행되었다. ‘학문적 동지’ 운운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발문 한 구절은 이러하다.
“아 지극하도다!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침잠하여 이 책에 몰두하면, 참되게 알고 실천하여 마음과 이치가 무르익어 이수伊水, 낙수洛水(정호, 정이 고향)를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수수洙水와 사수泗水(공자 고향)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책이 그 길머리가 되어 사서四書 등의 경서도 칼날처럼 쪼개지듯 이해하게 되리라.”
금계의 상소문은 명작이고, 걸작이다. 금계 41세에 지은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는 퇴계가 68세에 지은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비교된다. 『회암서절요』간행도 충격 자체였지만, 이 ‘상소문’은 임금을 움직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6세 연하의 제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금계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1557년 5월 7일, 명종께 올린 ‘단양진폐소’는 적폐가 쌓인 단양 주민들의 처한 현실을 상소한 글로, “관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러 적폐 때문에 우리 백성이 살아갈 수 없으니, 이를 어찌 관청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절규하는 상소였다. 5000자(정확히는 5001자)가 넘는 상소문은 그렇게 쓰여 졌다. 글 일부는 이러하다.
“세금과 부역을 감당 못해 기름 끓는 듯, 목마른 붕어가 모인 듯, 호소할 길 없으니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서 살며, 승냥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 마을은 인가에연기도 나지 않아, 전쟁이 난 뒤보다 더욱 심하여, 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
금계는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하고 호소하며, 10가지 조목의 계책을 제시하고, 10년 동안 세금을 감면해 달라 한다. 명종은 감동하여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며, “앞으로 10년 동안 20여 가지 공납과 세금을 특별 감면하라.”했다.
주민의 즐거움은 말할 수 없었다. 류민流民들이 돌아왔고, 굴뚝에 연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금계는 이때 기쁨을 시 한수로 읊었다. 그야말로 여민동락與民同樂이었다. 시 제목은 “은혜로운 글이 내려오니, 주민들이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恩書 一降 民有生意).”이다.
九死民生水火間 홍수와 가뭄 사이 겨울 살아난 생민들
汪恩如海欲酬難 나라 은혜 바다 같아 보답하기 어려우네
風茅破屋方謀蓋 바람 불어 무너진 집 다시 지붕 잇고
封棘荒田始闢閑 가지 덮은 거친 밭, 이제 개간 하네
鴻雁離群應集澤 무리 떠난 기러기 떼 연못에 모여드니
豺狼當道要驅山 길 막은 이리떼는 산속으로 쫒아내리
朋尊相慶看天日 함께 잔 들어 축하하며 하늘을 바라보네
江上秋高野色斑 강 위 가을은 높고 단풍이 물드는구나
(금계 자주自註: 온 고을이 모여 재생의 기쁨을 축하한 까닭으로 글을 짓다. 원문: 一郡設會 以慶再生之樂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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