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비 건립 특강 ...농암의 손서 금계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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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1회 작성일 23-08-11 12:35본문
금계는 과연 어떻게 농암 손서가 되었나? 기록은 없고, 일화는 이렇다.
농암이 경상감사가 되어 풍기를 지나가며, ‘게 물럿거라.’ 하는데, 어느 소년 혼자 전연 관심이 없었다. 가을 추수에 날아오는 새만 쫓고, 한편으로 책만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너는 감사가 지나가는데 보지도 않느냐” 하니, 말하기를 “감사가 가면 가는 것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냐.” 했다.
농암이 기이하게 여겨 물어 들어가니, 나이 비슷한 조부가 계셨다. 말하기를 “저의 손자가 버릇이 없어 무례했으니 용서 바랍니다.” 했다. 농암 답변이 “손자의 기백이 마음에 쏙 들고, 마침 내 손녀가 혼기가 되었으니 양가 인연을 맺어 봅시다.” 하여 이루어졌다 한다. ‘기동奇童’은 기동이었다.
농암의 감사 부임이 1536년 10월이고, 금계 나이 19세이니 그럴 듯하다. 금계의 집이 풍기 창락역昌樂驛 부근이어서 더욱 그럴 듯하다. 오고가는 벼슬아치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창락역은 단양-풍기-영주-도산(예안)으로 이어지는 중간 기착지 였다.
금계 조부는 금계에게 “훌륭하게 되어 집안을 일으키라” 했으니, 혼사를 적극 주선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농암이 1529년 영주군수를 역임했으니, 그 때 봐 두었을 수 도 있다.
76세 농암이 귀로에 풍기 우계愚溪에 우거寓居한 진사 황한충黃漢忠의 집에 묵어간 기록이 보인다. 시도 한 수 지어주었다. 오랜 친구였다. ‘애일당구로회’ 축하 친필 글씨가 남아 있으니, 두 분 우정은 25년은 더 넘었다.
진사는 창원황씨로 금계 외종조부가 되니,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금계는 외조부 황한필黃漢弼에게 글을 배우고 만사輓詞를 한 것으로 보아, 외조부가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농암은 이미 모두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농암 종증조부 예문관직제학 이오李塢가 금계 조부의 고모부였다. 그러니까 이오는 황유정에게는 손서孫壻가 되었다. 농암 어머니가 황유정과 그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담이 생장한 '삼판서고택'에서 이들의 보호로 성장했으니 모를 까닭이 없었다.
‘푸실’은 퇴계에게도 잊지 못한 곳이다. 21세 1521년, 푸실의 진사 허찬許瓚 따님에게 장가갔다. 창계 문경동文敬仝의 맏사위인데, 경남 의령에서 와서 처부모를 봉양했다.
퇴계가 허찬의 사위가 될 수 있었음은 창계와 숙부 송재와 교분 때문이었다. 허씨부인은 1522년 준寯, 1527년 채寀를 낳고, 한 달 후 27세에 돌아가셨다. 3년 후 1530년, 안동 가일 권씨부인을 맞이했다.
처남 진사 허사렴許士廉의 맏사위가 죽유 오운이고, 둘째 사위가 소고 박승임의 맏아들 박록朴漉이었다. 죽유 오운吳澐은 퇴계 종자형인 진사 오언의吳彦毅의 손자이기도하다. 초년과 만년 푸실에서 살았고, 이런 연유로 허씨부인의 묘갈명을 썼다.
창계 둘째 사위는 생원 장응신張應臣인데, 문절공의 증손자 김사문金士文이 그 사위였다. 사문의 아들이 백암 김륵이니, 퇴계에게는 처제종질이 된다. 퇴계 맏아들 이준李寯과 온계의 아들 이치李寘는 문절공의 외증손서가 되기도 한다.
퇴계는 안동 도산에서 영주 푸실로 갔고, 금계는 영주 푸실에서 안동 도산으로 온 셈이었다.
3)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은 자료이다. 글은 자료모음이 아니다. 자료를 가공함이 글이다. 자료를 벗어나도 안 되지만, 자료에 매어서도 안 되는 것이 글이다. 선현들의 글이 그러했다. 이른바 文, 史, 哲 의 통섭이다.
나의 글은 자료들을 기초로, 조금 가공하여 글 맛 흉내를 내 본, 그저 난필의 소견에 불과하다. 다음 글도 그러하다.
퇴계 조모 영양김씨는 93세를 살아 외종질 농암, 외종손 이중량, 시댁의 아들 송재, 손자 온계, 퇴계가 문과급제 하고 발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들 송재는 49세 1517년 몰했는데, 그 해 80대였다. 친구 최숙생崔淑生이 지은 묘갈명에 “아, 명중明仲이 죽었단 말인가! 80 노모가 집에 계시는데,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하는 애도 구절이 보인다.
농암 어머니 안동권씨 입장에서 보면, 외가의 외삼촌 김종金潧, 김담 형제, 친정의 동생 권수익權受益(호조참판), 권수복(무과급제) 형제와 조카 권운과 종질 권수, 시댁의 아들 농암, 손자 이중량 등 8명의 인친들이 한꺼번에 급제 했으니, 영양김씨와 더불어 당대 이런 영광을 누린 여인은 천지에 없었다. 그 일이 감격적임은 모두가 각 가문의 도산 입향 최초 문과급제로, 그들 씨족의 문호를 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농암 조모와 회재 이언적의 증조모가 청주양씨 자매여서 또한 7촌 사이가 된다.
농암이 특별한 효자가 되었음은 98세를 사신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85세를 사신 이 인자하고 총명한 어머니의 존재가 더욱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농암, 충재, 회재, 퇴계, 금계가 어떤 관계로든 더불어 인척관계를 맺고 있어, 퇴계의 행장 저술에 전연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시 한수 감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농암, 회재, 퇴계, 금계가 함께한 시여서 이들 인연을 더욱 빛나게 채색하고 있다. 참으로 이채로운 작품이다. 1544년 회재가 도백道伯으로, 농암을 예방하여 애일당, 혹은 강각江閣에서 함께하고, 돌아가 지어 보낸 시이다. 강각은 회재 래방 직전 완공되었다.
회재의 원운은 농암을 찬양하고 분강 일대의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 이에 농암은 감사의 인사로 화답했고, 퇴계, 금계는 농암 찬양으로 일관되어 있다. 모두 회재의 린鱗, 빈頻의 어려운 운자韻字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화답 시를 쓰고 있다.
회재 원운 제목은 “농암 상공께 드린다(奉呈 主人相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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