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목민관 황준량의 눈물어린 상소문 /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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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6회 작성일 22-03-13 05:22본문
“상소 내용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어 내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단양의 조세와 부역을 앞으로 10년간 감면한다.”(조선왕조실록, 명종 12년 5월17일) 실로 감격적인 결정이었다. 황준량의 공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이다.
민속촌에 가면 옛 관아 건물에는 으레 오라줄에 묶인 백성이 형틀 앞에서 문초를 받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있다. 이는 옛날에 원님, 사또로 불린 지방 수령은 한 고을의 행정, 사법권을 모두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건 정말로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지방관이란 모름지기 한 고을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牧民官)이었다. 그럼에도 춘향전의 변사또처럼 못된 탐관오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상 모범을 보인 참된 목민관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남한강을 따라가는 답사길에 올랐다가 단양 수몰지구에서 옮겨다 놓은 황준량(黃俊良) 군수의 공덕비를 보고 있자니 우리 역사에 이처럼 훌륭한 목민관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때는 16세기 중엽, 조선 명종 연간 이야기다. 을사사화를 비롯하여 온갖 변란이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기에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여 도망가는 유망(流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임꺽정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황준량은 고을의 참상을 살피고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신(臣)이 군수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단양은 본디 원주의 조그마한 고을이었는데 외적을 섬멸한 공로가 있어 군으로 승격된 곳입니다. 그러나 삼면이 산으로 막혀 있고 한쪽은 큰 강이 흘러 농토는 본래 척박해서 홍수와 가뭄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곳입니다.
오늘날 도지사, 시장, 군수는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정치인의 몫으로 되어 요즘 세태를 보면 이 지위를 옛날 원님 사또 벼슬로 생각하거나 정치적 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로 삼는 안타깝고 씁쓸하고 괘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방 수령의 근본은 모름지기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이다. 목민관 황준량의 공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했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갈 길이 날로 옹색해지자 백성들이 다 도망가고 이제는 부역에 나아갈 수 있는 민가가 겨우 40호에 불과합니다. 경지 면적도 (옛날의 4분의 1인) 300결도 되지 않아 징수할 곡식의 반밖에 받아내지 못했는데 그나마도 피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역의 재촉과 가혹한 세금 때문에 가난한 자는 더욱 곤궁해지고, 곤궁한 자는 이미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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