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산 병산(屛山), 풍기 백동(白洞), 문단(文丹) 일대 창원 황씨(昌原黃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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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4회 작성일 21-08-10 04:38본문
단산 병산(屛山), 풍기 백동(白洞), 문단(文丹) 일대 창원 황씨(昌原黃氏) 영주의 순흥, 풍기 및 봉화 문단(文丹) 일대에 그 뿌리를 굳건히 하여 세거하고 있는 창원 황씨 일문(一門)은 고려조에 의창현(義昌縣)의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던 황양충(黃亮冲)을 시조로 삼으면서,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해 대상(大相)에 이르렀던 황석주(黃石柱)를 그 중시조로 삼는다. 따라서 영주의 이 창원 황씨 일문은 황양충, 황양돈(養敦 : 정조호장), 황석주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지는데, 대상에 올랐던 석주를 기준으로 삼아 ‘대상공파’라고 칭한다. - 석주의 선대를 기준으로 하여, ‘호장공파’라 칭하기도 한다. 석주의 아들 황영렬(黃英烈)은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추봉되었고, 영렬의 아들 황유(黃裕)는 충렬왕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와 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또 그 아들 황진백(黃眞伯)은 침원서 영(寢園署令)을 역임하였다. 영주에 세거하는 창원 황씨 일문의 초기 인물들은 토착호족으로서 그 재지적(在地的) 족세(族勢)를 얻은 기반 위에서 다시 과거를 통해 발신함으로써, 이미 이른 시기부터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이 일문의 영주 입향조는 진백의 아들인 황승후(黃承厚)이다. 그는 신호위 정용 중낭장(神號衛精勇中郞將)을 역임하였으며, 누대 세거지인 창원에서 순흥(順興) 병산(屛山)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아들 황처중(黃處中)은 영일 감무(迎日監務)를 지냈고, 처중의 두 아들인 황제(黃躋)와 황전(黃躔)도 각각 도량서 승(都梁署承)과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냄으로써, 입향 이후에도 그들의 사환은 이어졌다. 즉 이 일문이 이전 시기부터 누렸던 사회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황전(黃躔)의 경우, 순흥에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그에게 미곡(米穀)을 주고 아울러 그 가운데 은(銀)을 놓아두었으나, 물건을 수수하는 올바른 의리(義理)를 헤아려 이를 거절함으로써, 후에 순흥 일대에 불어 닥친 일대 화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황전의 의리에 대하여, 이광정(李光靖)은 「봉례황공전별묘봉안문(奉禮黃公躔別廟奉安文)」에서 “금방 화가 일어나 죽계(竹溪)가 피로 물들었네. 눈앞에서 가혹한 형벌 행해졌으나 공만은 초연하였네. 우리 황씨 면면하니, 아! 공(公)으로 인하여 온전할 수 있었네.[俄頃禍作, 竹溪血赤. 咫尺虀粉, 公獨超然. 我黃緜緜, 繄公得全]”라고 평하였다. 그는 영주에 정착하여 성장하기 시작한 이 가문이 이후 영주의 한 기축(基軸) 가문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토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이 가문의 주요 인물을 살피기에 앞서, 비교적 선행하는 시기인 조선중기 이전을 중심으로 하여 그 자손들의 이거 상황을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사환을 목적으로 상경하여 한때 서울에서 생활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이거는 대개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인 풍속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부 피란(避亂) 과정에서 본토와 유리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거한 계열은 몇 세대가 지난 후 다시 고토(故土) 귀환 의지를 가지고, 귀향한 경우도 있으며, 아래에 보이는 바 황유현(黃有顯)의 경우와 같이 끝내 돌아오지 못한 계열도 있다. 첫째, 황승후의 손자 황제(黃躋)는 이후 내마암(內馬巖)으로 옮긴다. 둘째, 황전(黃躔)의 손자인 순릉 참봉(純陵參奉) 황희성(黃希聖 : 종사랑 황귀경(黃貴卿)의 아들)은 풍기의 희야골[白洞]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그가 희야골에 거주하던 고모부 노계조(盧繼祖)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아울러 그는 풍기의 대표적 토족(土族)인 풍기 진씨(豊基秦氏) 일원인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진유경(秦有經)의 사위가 되기도 하였다. 백동에 정착한 그는 용헌(慵軒) 황사우(黃士祐) 및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 황사호(黃士豪), 현감(縣監) 황사걸(黃士傑)을 낳아 모두 걸출한 인물로 성장시킴으로써, 누대로 백동 일대에 관료와 학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하였다. 셋째, 황전(黃躔)의 아들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황윤경(黃允卿)의 손자 황사언(黃士彦 : 사재감 정(司宰監正) 역임. 참봉 황희숙(黃希淑)의 아들)은 병산에서 문단(文丹)으로 옮겨갔다. 넷째, 풍저창 직장 사호의 아들인 봉화 훈도(奉化訓導) 황여규(黃汝奎)는 남면(南面)의 와룡동(臥龍洞)으로 옮겨간다. 다섯째, 황사우의 아들인 황서규(黃瑞奎)는 그 장인인 고성군(固城君) 이강(李綱)의 제사를 받들게 되면서 서울로 옮겨갔다. 이는 조선초기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섯째, 통덕랑(通德郞) 황고(黃杲)의 아들인 황유현(黃有顯)은 풍기에서 서울 연지동(蓮池洞)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그 후손들은 양양(襄陽 : 예천의 고명(古名)을 가리키는 듯함.)에서 우거(寓居)하는 등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황유현의 묘소는 실전되기에 이른다. 끝으로, 이산 현감(尼山縣監) 황영손(黃永孫)의 아들인 상원 훈도(祥原訓導) 황창(黃瑒)은 풍기 고로곡(古老谷)으로 이거한 바 있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황명택(黃命澤)은 순천으로 들어가 그곳 군수(郡守)의 사위가 되어 살게 되었다. 영주의 대상공파는 주로 순흥, 백동, 문단 지역 등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관료 및 처사, 학자를 배출하고, 지역 사림 네트워크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특기할 만한 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목천 교수(木川敎授) 황한필(黃漢弼)은 그 문행(文行)이 순흥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킨 바 있었으며, 아울러 외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늘 그에게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필의 동생인 우수동주(愚叟洞主) 황한충(黃漢忠)은 그의 「화당시고취(和唐詩皷吹)」가 주세붕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그의 은거지인 순흥 우수동(愚叟洞)을 무릉도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백동의 황사우(黃士祐)는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경상도 도사 재임 시절에는 사환일기인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를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영주 군수로 있을 때에는 인재들을 잘 권면하여 온계(溫溪) 이해(李瀣) 등 많은 선비들이 학업을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과 그 아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으며, 관직이 병조 판서와 우찬성에 이르렀고, 사후에 숭덕사(崇德祠)에 모셔졌다. 또한 석교(石橋) 황득겸(黃得謙)은 올곧은 처사의 풍모를 견지하면서, 침간정(枕澗亭)을 지어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황사우의 아들인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는 생원시와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으며,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으로부터 “삼대(三代) 이하의 인물이 아니다.”라는 호평을 받았다. 재임 시절에는, 조정에서 그 선발을 엄격히 하였던 사유(師儒)로 선발되었고, 청도와 단양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낌없는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소수서원에 별재(別齋)를 지어 동몽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익공(貞翼公) 식암(息庵) 황섬(黃暹)은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문인으로서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충의를 발휘하여 시종 호가(扈駕)하였다. 특히 그는 경세적(經世的) 지략이 탁월하여 국가에 약석이 될 만한 충심어린 의론을 누차 올렸다. 그의 행장을 지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그의 헌책(獻策)에 대하여 하나하나 비평을 달고, “그가 전후에 올린 논의는 실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절박한 것이었다.”라고 총평하기도 하였다. 훈도(訓導) 황여규(黃汝奎)의 아들인 종고(宗皐) 황서(黃曙)는 진사시와 알성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으로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에 의해 가장(假將)으로 선임되어 병무(兵務)・농무(農務)에 힘쓰는 등 백성들을 안집(安集)하는 데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런가 하면, 황응규의 아들인 부훤당(負喧堂) 황시(黃是)는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관직이 좌승지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다. 그는 김생(金生)을 숭상한 부훤당의 필법(筆法)을 잘 계승하였다. 또한 박승임의 제자였던 양심당(養心堂) 황엽(黃曄)이 있는데, 그는 사문(師門)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아 제사 예법에 철두철미한 정성을 기하였다. 황섬의 아들 조대(釣臺) 황유중(黃有中)은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 정권이 열리자 낙향하였으며, 이후 관직에 임명되었어도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유길(黃有吉)의 아들로 무인적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황입영(黃立潁)은 당시 북벌론(北伐論)이 팽배하던 세상에서 방외인(方外人)의 풍모를 견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문단의 대원수[騷壇大元帥]”라는 호칭을 얻었던 단구(丹邱) 황창술(黃昌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부모의 숙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81세 때에 기어이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진동보(陳同甫)의 사람됨을 늘 사모하여 고금을 하찮게 여기고 글과 술로써 회포를 달래니, ‘천하 기남자(天下奇男子)’를 자처하였다. 찰방(察訪) 황입현(黃立顯)의 아들인 백우(白羽) 황염(黃琰)은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며, 책 읽기를 몹시 좋아하여 음양(陰陽)・산수(算數)・성상(星象)・감여(堪輿)의 학설까지 광범하게 섭렵하였다.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의 문인인 일성재(日省齋) 황후(黃 이밖에 영주의 대상공파는 처사적 삶에 투철하였던 백옥(白屋) 황사원(黃泗源), 대산(大山)・소산(小山)의 문인인 죽헌(竹軒) 황최원(黃最源), 대산의 문인으로 지역의 큰 학자로 성장하였던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 -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은 “근세에 정와(貞窩) 황모(黃某)와 같이 학문이 정밀하고 견식이 분명한 이가 없다.”고 호평하였다. - 등을 배출하였으며, 소암(素菴) 김진동(金鎭東)의 문인인 백천(白川) 황서한(黃舒漢),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던 학자인 소계(素溪) 황연한(黃淵漢), 정와의 문인으로 의약(醫藥)・복서(卜筮)・음양(陰陽)에도 광범한 지식을 쌓았던 백야(白野) 황중신(黃中愼) 및 그 동생으로 주자봉사(朱子封事)를 혹호(酷好)했던 이재(怡齋) 황중형(黃中炯),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고 승지를 역임하였던 황인하(黃仁夏), 성균관 유생의 항절(抗節)을 가감없이 과시했던 저초(渚樵) 황조하(黃肇夏), 류치명의 문인으로 저술을 통해 위정(衛正)을 실천하였던 대계(大溪) 황재영(黃在英),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와 복재(復齋) 강건(姜楗)의 문인이었던 극재(克齋) 황기도(黃基道), 풍기의 3・1만세운동을 격화시켰던 후송(後松) 황정흠(黃鼎欽) 등 일도(一道)와 일향(一鄕)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영주의 대상공파 창원 황씨 문중은 순흥 땅에 정착한 이후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기반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다가, 황섬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 결실을 볼 수 있었으며, 이후에는 뛰어난 처사(處士)와 학자를 배출하여 그 명망을 이어 나갔다. 특히 소수서원, 풍기향교의 원임(院任)・교임(校任)을 꾸준히 배출함으로써, 지역의 공론형성과 교육활동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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