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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써 나라를 수호한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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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5회 작성일 21-08-10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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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써 나라를 수호한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생애와 그의 시
최효정 2017년 04월 14일 금요일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으로 1904년 4월 4일 경복 안동에서 태어났다.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연수했으나 끊임없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해 1923년에 일본 동경에 있는 대학에 1년 간 다니다가 이후 1925년에 귀국했다.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와 일제 주요기관 등을 파괴하다가 대구형무소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독립운동가 윤세주의 의열투쟁에 이육사는 큰 감명을 받고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다.

활발한 의열투쟁을 전개하던 중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이육사는 형, 동생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됐다. 이때,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기 때문에 수감번호를 따서 호를 육사라 지었다.

이육사는 형, 동생과 함께 온갖 고문을 당했으나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자 2년 4개월여간의 옥고를 끝으로 석방됐다.

1932년 6월 초 북경으로 가 루쉰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했으며, 후일 루쉰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이육사는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32년 10월 22일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했다.

이후 이육사는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건강이 매우 악화돼 앞으로 진로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와 고민을 하게 됐다. 마침내 이육사는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운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했다.

이육사는 정치, 사회 분야에 걸쳐 폭넓은 작품생활을 해 1935년 ‘개벽’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을 발표했다.

다음 해인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를 발표, 시인으로서 출발해 이어 ‘해조사’ ‘노정기’ 등 산문을 발표했다.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 작품과 ‘조선 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비판’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대표 시를 발표했다.

1941년에 들어서자 일제가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이육사의 건강은 아주 극도로 악화됐으나 문필생활은 의연히 계속돼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께 북경감옥에서 별세했다는 부음이 가족들에게 전해지고 북경주재 일본 영사관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한 유해는 서울,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민족시인 이육사는 1960년에 고향 원촌으로 이장돼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이 잠들게 됐다.

최효정 고양 화정고·미디어경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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