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鶴書院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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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5회 작성일 21-08-10 04:19본문
백학서원은 금계 황준량에 의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영천시 화산면 모산리에 위치한 양강소 절벽위에 세워졌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훼손되고 장소가 협소하여 그 후 화남면 능계리로 이건한 관계로 지금은 단지 그 터만 남아 있다. 나의 옛 벗인 권영주군과 함께 고허를 찾아 본 후 그 느낌을 한문으로 짓고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다.
白鶴書院
歲在壬午時維四月某日日傾之際,與故舊權寧柱君,尋訪於白鶴山,其故則欲見白鶴書院古址也.乃會氣候順和,日晴風良,滿目庶物,盡爲秀麗,可以知萬物得時.夫白鶴山者,所在於花山面佳上里,自永經路有二焉.一路,進入於淸通三釜茅山之路,一路,進入於道林梅山月溪之路也.我等選乎後者,以乘用車移動,停車于羊江之邊,則正對大川也.徒步以登攀,蹊間瘠路,草木蒼茂而濃綠,萬花芳發而競姸,嗚呼!天下勝處,此除而何哉?濕乎樹香,醉乎華馨,不覺光陰矣.而過一刻餘,到於羊角,忽然眼前闊然,一帶壯觀展開.千仞斷崖,花卉林林,萬落下處,菉水悠悠.仰觀穹窿,而淑氣充溢,俯見原野,而處處農人,嗟乎!是方知盛春之時也.於是向北聳然,一作高丘,世稱白鶴矣.是白鶴山,以華山爲靈源,直道南走,一轉而爲白鶴,再轉而爲睡鶴,雖其勢不爲雄偉,而時隱時出,若絶若連,不絶如縷,谷谷作邑,可以爲一區之佳處.觀乎骨伐志(永川鄕土史硏究會所作.載錄於第五集中),古有山城,本爲臨屯故址,花東城主之所築云爾.雖眞僞未詳,猶有城痕,的然示之於今人,是人棲之久可知矣.城下向離山麓,一有遺墟,是所謂「白鶴書院」之故址.然數百載而經,風雨所侵,累經兵燹,荒然廢置,而未有殘迹,使見者萬懷生焉,愴然不禁.然細心觀察,猶有瓦片礎石,便見古人創院之情,果言無證乎?夫「白鶴書院」者,古無所記,而唯有「風詠亭逸稿」中一二存焉.蓋「風詠亭」者,以人之號爲稱,姓權氏,本安東,諱應道,字士弘,號風詠亭,西紀一六一六年八月十七日,生于花山面佳上里舍第,西紀一六六二年登科于司馬試一等五人中三人,而卽歸于家,講學於新寧鄕校及白鶴書院,西紀一六七三年三月一日考終于寢處.「逸稿」云,『擇新基而移創,建院之規模已成.仍舊貫而改,爲講學之堂宇.斯作虹樑,擧於白日,燕賀徧於靑襟.竊惟書院經始之初,粵在錦溪爲宰之日,錦溪之自述佳什,燦瓊玉於壁間,退陶之手筆華扁,煥銀鉤於楣上.幾多儒林之矜式,幸爲後學之藏修.雖見災於島夷,慶重營於僉議.遺風不泯,至孝彌長.誦「存心主敬」之詞,怳若面承指誨,琓「玉澗風臺」之句,依如目覩詠歸.享祀之禮,當興守護之路宜廣.然局內之逼窄,況山脊之剛燥,不便於立廟設齋,無望乎井飮田食,玆用移建於勝地…(中略)…將有崇奉之儀,先爲培養之所,士子向道之志,從此益勤,民俗尙賢之風,自玆愈振…(中略)』(以上白鶴書院移建講堂上樑文中所載)『甲午十二月,日維二十五,新基避痘患,舊址將移寓.處置家中事,心緖多紛拏…(中略)…二十八日夕,忽有僧來拜,乃言我舅氏,再昨臨白鶴.又說今午亦,來有司朴皆,云舅氏招請我.我卽騎馬去,舅氏見我至…(中略)…念舅常獨處,思遣姪兒侍,資糧乃送之.二月日初二,臨行重寄語,學業須著力.我自送兒後,益歎身居獨,騎馬日日往,拜舅且見姪…(中略)』(以上寓中述懷中所載)以上之書,蓋嘗論之,白鶴書院創始者,則錦溪黃俊良,其時則錦溪之作新寧縣監矣.黃俊良爲李退溪之門人也.早入聖門,已涉流面,歷關內職,旣矣乃赴邑宰.所謂政者莫如習禮,莫如育民,詩禮所以敦乎性情,讀書所以使民易簡.於是周察民俗,賴乎天賦,物貨集産,民俗醇厚,而惟獨庠序未洽.雖然新寧鄕中到處散在鄕校書院,而至於大良(現花山面)及古縣(現華南面)等地,一無書院,是故兩邑之間,欲置學堂,則白鶴山者,在於兩邑之間,所在適宜,加爲勝處.然地所狹隘,而未備廟宇,僅設講堂,以爲近方來學者之講學之所也.於是以退陶之手筆爲扁而揭楣,以錦溪之自書爲訓而飾壁,其事蹟者,以詩見於花山誌及鄕錄也.然不測者天也,不堪者歲也.其後壬辰亂時倭人之所侵而毁損,世久而廢荒,鄕中有意者之爲患久矣.於是以衆議爲遷,其地則現華南面漢川里所在也,則白鶴書堂(白鶴學院)故址矣,時以考之,槪自西紀一六五二乃至西紀一六七三年許也.於是予敢自處後儒,以七言爲歌,歌曰,古人登來白鶴山,與友率牽復登臨.昔年白鶴今何在,羊江斷崖綠樹林.前修詠歸怳若見,後儒逍遙終不尋.白鶴已去故遺墟,無心花鳥得時吟.壬午寒露之節
백학서원 답사기(국역문-한글)
임오년(서기2002년) 4월 어느 날 오후 무렵, 나는 옛 친구인 권영주군과 같이 「백학산」을 찾았는데, 그 이유는 「백학서원」의 옛 터를 찾아보고자 함이었다. 마침 화창한 날씨는 맑고 바람마저 좋아,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모두가 아름다워, 가히 만물이 그 때를 만났음을 알겠다.
「백학산」은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 소재 하는데, 시내에서부터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28번 국도를 따라 청통 삼거리에서 삼부로 들어가 모산으로 진입하는 길이며, 또 하나의 길은 35번 국도를 따라 도림에서 매산을 거쳐 월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우리들은 후자를 택하여 승용차로 이동하여 양강(고현천) 가에 자동차를 세워두었으니, 바로 대천리의 맞은편이 된다.
도보로 걸어 등반을 하는데, 좁고 가파른 산길의 좌우에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여 짙고 푸르며 온갖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다투니, 아! 참으로 천하의 절경이로다. 나무들이 내뿜는 향기에 온 몸이 젖고 꽃향기에 취하여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산길을 걸은 지 한시간여 만에 드디어 「양각」(백학산이 있는 곳으로서 양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어 이부분은 비교적 낮은 곳이다. 지금은 바로 아래에 절집이 하나있고, 양각의 아래 고현천을 ‘양강소’라고 부른다)에 도착하니, 홀연히 눈앞이 트이며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천길 아득한 낭떠러지에는 풀과 꽃들이 자욱하고, 만길 절벽 아래에는 푸른 물이 넘실댄다. 우러러 하늘을 보니 봄의 기운이 가득 차 있고, 고개 숙여 들판을 보니 곳곳에 농부들의 모습이라. 아! 바야흐로 지금이 봄이 무르익은 줄을 알겠구나.
이에 북쪽을 보니 우뚝 솟은 하나의 산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세인들이 「백학산」이라 부른다. 이 백학산은 화산을 그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삼아 똑 바로 남쪽을 향해 달리다 한번 감아 돌면서 「백학산」을 만들고, 두 번 돌아 「수학산」을 만들었으니, 비록 그 산세가 거대하지는 아니하지만 때로 숨기도 하고 때론 나타나기도 하며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하여 끊임이 없으며, 골골마다 마을을 만들어 가히 지역의 중심적인 곳임을 알겠다.
「골벌지」(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만든 것. 제5집 가운데 실렸음)를 살펴보면, 옛날 산성이 이었으니 본래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의 옛터이며, 화동 성주가 만든 것이라 한다. 비록 그 말의 진위여부가 상세하지는 않다지만, 지금도 성의 흔적을 확연히 볼 수 있음으로 미루어 이 땅에 사람들이 산지가 오래되었음을 알게한다.
성터아래 남쪽을 향한 산록에 하나의 흔적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백학서원」의 옛 터이다. 그러나 수 백년을 지나면서 비바람이 침범하고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져, 현재는그 흔적마저 희미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생각이 나게 하므로, 처량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약간의 관심으로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숱한 기와 조각과 주춧돌을 발견 할 수 있으니, 문득 옛사람의 서원을 지었던 마음을 보이는 듯도 하므로 과연 증명할 것이 없다 말하겠는가?
「백학서원」에 대하여 언급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풍영정일고」라는 책 속에 백학서원과 관련 된 기록이 한둘 보인다. 「풍영정」이란 사람의 호를 말함인데, 성은 권씨 본관은 안동이며 이름은 응도 자(이름대신 쓰는 것)는 사홍 호는 풍영정으로, 서기1616년 8월 17일 화산면 가상리 사제에서 태어나 서기1662년 사마시 1등 5인중 제3등으로 등과 하였지만, 성균관 입학을 거부하고 즉시 귀향하여 신령향교와 백학서원에서 학문을 강의하다, 서기 1673년 3월 1일 돌아가셨다.
그가 남긴 문집(풍영정 일고)에 이르기를 『새로운 터를 골라 건물을 옮겨 지으니 서원을 세우는 규모가 이미 완성되었네. 옛 제도를 따라 고쳐지어 강학의 집(서원)으로 삼는다. 이에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대들보를 만들어 밝은 날에 들어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학생들을 축하하네. 그윽이 서원을 처음 경영하던 때를 생각해보니, 지난 날 황준량이 신령현감을 지낼 때였으니, 황준량이 스스로 만든 절목(서훈) 열 가지가 찬란하게 (서원의)벽 사이에 빛나고, 퇴계(이황)선생이 손수 쓰신 (서원의)편액이 빛나게 문미에 걸려있네. 많은 유림들의 모범을 바래어 다행스럽게도 후학들의 장수(藏修)함이 되었구나. 비록(임진왜란 시) 왜적들의 침입을 받긴 하였지만, 모든 이들의 의논으로 새로 세우게 됨을 경하한다. 남기신 풍교(風敎) 사라지지 아니한다면 지극한 효성은 더욱 더하리라. 「존심주경(存心主敬)」(시의 한 구절)이라는 말을 외우니 어슴프레함이 마치 받들어 마주하고 가리켜 가르치는 듯하며, 「옥간풍대(玉澗風臺)」(역시 시의 한 구절)라는 구절을 완상하니, 마치 시 읊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뵙는 듯하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를 일으키는 길이 넓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국내가 좁으며 하물며 산등성이의 땅이 척박하여 묘우(선현을 제사하는 집)를 세우고 재사(기숙사)의 설치에 편리하지 아니하며, (더욱이)우물 물을 길어 먹고 위토답을 부치는 것을 바랄 수도 없어, 이러한 이유로써 (보다)좋은 곳으로 옮겨 세우고자 …(중략)…장차 (선현들을)숭상하고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먼저 배양(培養)의 장소가 되어야 하리니, 선비들의 도를 지향하는 뜻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힘쓸 것이며, 백성들의 풍속이 어진 이를 높이는 풍조가 이로부터 더욱 떨쳐지리라…(중략)』(이상은 ‘백학서원이건상량문’가운데 실려 있는 내용임)
『갑오년 12월 25일 신기리(현 화산면 암기리)로 마마(천연두)를 피하여 옛 집(화산면 가상리 본가)으로부터 장차 우거 할 곳으로 가고자 집안 일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잡아당기는 듯하다.…(중략)…(12월)28일 저녁 갑자기 스님이 와서 (나에게)절을 하면서 나의 장인께서 이틀 전에 ‘백학서원’에 와 계신다고 말하였으며, 또한 오늘 낮에 (백학서원의)유사인 박씨가 와서 말하기를 나의 장인께서 (백학서원으로)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말을 타고서 갔더니 장인께서 나의 조카를 만나 보고 계셨다.…(중략)…장인께서 항상 혼자 계시는 것이 염려되어 조카를 보내 모시게 하고 양식을 (백학서원으로)보내 주었다. (이듬해)2월 초2일 (백학서원으로)간 길에 (조카에게) 재차 당부하기를 “학문은 오로지 (경학으로) 힘을 붙여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조카를 (백학서원으로)보낸 후에 더욱 나 혼자 있음을 한탄하여 말을 타고서 날마다 (백학서원으로)거서 장인을 찾아 뵙고 아울러 조카를 만나 보았다.…(중략)』(이상은 ’우중술회‘ 가운데 실려 있는 내용임)
이상의 기록으로 추론해보면, 「백학서원」의 창시자는 곧 금계 황준량이며 그 시기는 곧 황준량이 신령현감을 지낼 때였다. 황준량은 이황 선생의 제자였는데, 일찍이 이퇴계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완성하였고, 그 후 대과에 오른 후 두루 내직을 거쳐 이윽고 신령의 현감으로 부임한 것이었다. 소위 정치란 예절을 익힘 만한 것이 없고 그리고 백성을 기름 만한 것이 없다. 그것은 시와 예절은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두텁게 하는 까닭이며, 학문은 백성들을 다스리기를 쉽게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 신녕으로 부임하여 두루 백성들의 풍속을 살펴본즉, 천부(天賦)에 힘입어 온갖 물품과 재화가 모이고 생산되며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웠다. 그가 가장 관심을 보인 분분은 교육분야로서, 고을 내 에는 향교와 서원 등의 교육기관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량면(현 화산면)과 고현면(현 화남면)등지에는 이렇다할 학교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량면과 고현면 사이에 학당을 설치하고자하여 마땅한 장소를 찾던 중 마침 백학산은 이 두 개 면의 사이에 위치하여 장소가 적의하고 또한 자연 경관이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원이 위치한 터가 좁아 묘우(廟宇:선현들에 대한 제사등을 드리는 집)를 갖추지도 못해 겨우 강당만을 설치하여, 그것으로 근방에서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에 퇴계선생께서 손수 써주신 것을 편액으로 하여 문미에 걸고, 황준량이 자신이 직접 만든 절목(원훈)을 벽 사이에 걸어두고서 서원을 운영하였다 한다. 그 사적들은 「화산지」와「신령향록」에 시(詩)로써 보인다.
그러나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며 견디지 못함은 세월인 것. 그 후 임진왜란 시 왜적들의 침입을 받아 헐리고 손상되고 세월이 오래되자 황폐해 졌으니, 이야말로 고을 내 뜻인 사람들의 걱정이 된지가 오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그 장소는 곧 현 화남면 한천리에 소재하며 「백학서당(학원)」의 옛 터이다. 시기로는 아마도 1652년에서 1673년쯤 으로 추정 된다. 이에 나는 감히 후유(後儒:후세의 유생)로 자처하면서 7언으로 노래하기를,
옛사람이 올랐던 백학산에
나는 벗과 함께 다시 올랐다
지난날의 백학은 어디에 있는지 간 곳이 없고
양강의 절벽에는 푸른 나무만 빽빽하네
전수(前修)들의 시 읊으며 돌아감 눈앞에 선한데
후유(後儒)는 아무리 헤매어도 찾지 못하네
백학이 이미 날아간 옛 터에는
무심한 꽃과 새들 때 만남을 노래한다
이 기록문은 희암 김재석(영양김)이 1900년 옛 백학서원 옛 터에 백학서당 강당 건물을 중건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여기 희암고에서 발췌한 원문과 본인의 역문을 실어 향토사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白鶴書堂重建記(原文)
寧之白鶴書堂嘉靖間錦溪黃公之莅是邦爲士林構一堂于羊江之上鶴山之下稟于陶山夫子以定節目爲一鄕多士講學之所者也至肅廟戊午鄕之父老移築于陵山下揭以白鶴書院享退翁配以錦爺以寓羹牆之慕者百有年所今上戊辰以邦禁撤焉半畝明宮化爲榛莽平礎崇牆沒入邱墟凡爲縫掖之倫者安得無今古之感哉程夫子曰井不忍廢地不忍荒竊念古之書院本爲士子之藏修不但爲祀典則建堂講學何拘也乃者鄕士某某等幹其事卽舊而新之因院而堂之凡十架中三爲堂西上爲房南翼爲樓東上爲室南翼爲退渠渠廈屋第見雲物改觀草木增輝吾黨君子攝齊而升讀先正之書講先正之道使先正之敎煥然復明於世則彼世外邪說曲學自當消雪於晛而斯堂也將與羊江鶴山流峙無窮也堂旣落僉曰識哉顧錫也亦陶山之遺徒也況忝在堂任義不敢以不文辭遂書此爲諸君子誦之
백학서당 중건 기문(역문)
신녕의 백학서당은 가정연간 금계 황공(황준량)께서 이 고을에 부임하여 사림(士林)을 위해 양강(羊江:현 화남면 대천리 건너편 고현천)의 위 백학산의 아래에 한 채의 집을 지어 도산선생(퇴계 이황)에게 품부(稟賦)하여 절목(節目)을 정함으로써 한 고을의 많은 선비들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숙종조 무오년(서기1678)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능산(陵山)아래에다 이축(移築)하여 :백학서원“이라 편액하여 퇴계선생을 주향(主享)으로 금계 황준량을 배향(配享)으로 하여 이로써 갱장(羹牆:추모하여 사모함)의 사모함을 부친 것이 100여년만인 고종조 무진년(서기1868) 서원 철폐령으로 (이 서원을)철거하여 반무(半畝)의 위토와 명궁(明宮)은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은 평평해졌으며 높은 담장은 언덕의 빈터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이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무리들(縫掖之倫)이 어찌 고금(古今)의 느낌이 없겠는가?
정이천(程頤)이 말하기를 “우물은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은 차마 버릴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윽이 예전의 서원을 생각해보면 본래 선비들의 학문하는 장소인지라 비단 (성현을)제사하는 곳일 뿐만이 아닌즉, 강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이 무엇에 구애된단 말인가?
이에 고을의 선비 모모씨 등이 그 일(서원을 새로 짓는 일)을 주간하여 옛 법도로 나아가 새롭게 하고 서원으로 인하여 강당으로 하니, 무릇 10칸 가운데 3칸을 강당으로 하고 서쪽의 위는 방으로 남쪽의 날개는 다락으로 동쪽의 위는 실(室)로 남쪽의 날개를 퇴실(退室)로 하니, 으리으리하게 큰 집이라.
다만 보이느니 운물(雲物)은 경관을 바꾸고 초목(草木)은 그 색깔을 더한다. 우리 고을의 군자들이 옷자락을 걷고 올라 선정(先正:先哲)의 글을 읽고 선정(先正)의 도(道)를 강론(講論)하여 선정(先正)의 가르침으로 하여금 환하게 하여 다시금 세상을 비추게 한다면, 즉 저 세상 밖(世外)의 사악한 말(邪說)과 잘못 된 학문(曲學)은 저절로 햇빛아래 눈처럼 녹을 것이며, 이 강당은 장차 양강과 학산과 더불어 무궁한 훗날에 까지 흐르리라.
강당이 이미 준공(낙성)되어 여러분들이 말씀하기를 “기문을 써 주게”라 하기에,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퇴계 선생의 남긴 무리(遺徒)이며, 하물며 욕되게도 강당의 임원임에랴?
의리상 감히 글재주 없음을 이유로 사양치 못하고서 드디어 이로 기문을 쓰노니 여러 군자들은 외울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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