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權橃, 1478(성종 9)~1548(명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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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22-10-09 06:08본문
권벌[權橃, 1478(성종 9)~1548(명종 3)]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중허(仲虛)이고,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이며, 시호는 문정(忠定)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성균생원증영의정 사빈(士彬)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다. 1506년(중종 1)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고변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이조정랑·호조정랑·영천군수·장령·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부좌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1539년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로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병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장령·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고,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나자 이기(李기)·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임백령(林百2)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柳仁淑)·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태천(泰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벌은 관직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문집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그의 일기초(日記抄)인 『충재일기』(冲齋日記)는 『한원일기』(翰院日記) 2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함추단일기』(新昌含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으로 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일기라기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중종실록』의 편찬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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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안동으로, 성균생원증영의정 사빈(士彬)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다. 1506년(중종 1)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고변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이조정랑·호조정랑·영천군수·장령·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예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부좌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1539년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로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병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장령·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고,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나자 이기(李기)·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임백령(林百2) 등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柳仁淑)·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태천(泰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588년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벌은 관직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정치에 영남 사림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문집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그의 일기초(日記抄)인 『충재일기』(冲齋日記)는 『한원일기』(翰院日記) 2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함추단일기』(新昌含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으로 되어 있는데, 개인적인 일기라기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중종실록』의 편찬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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